비전 멘토링 칼럼 217

217. 욥기를 통해 배우는 비전 멘토링

샬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비전 멘토링 컬럼, 오늘은 [욥기를 통해 배우는 비전 멘토링]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욥의 세 친구

욥기의 주요 등장 인물 중엔 4친구가 있습니다. 욥기 2장엔 먼저 세 친구가 다음과 같이 등장합니다.

2:11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2:12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2:13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세  친구에 대한 변호

욥기를 접한 바가 있는 사람들은 욥의 세 친구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비판적인 시선을 갖습니다. 그들이 욥을 대적하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친구들은 사실 보통 분들이 아닌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 세 친구들은 우선 자기가 사는 지역을 대표하는 유력자들로 욥과 오래 사귄 정말 사랑이 넘치고 신실한 분들입니다. 욥이 망하고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사람들이 도망갔을 때 욥에게 찾아와 함께 겉옷을 찢고 울며 7일간이나 말을 하지 않고 다만 함께 고통을 나눕니다. 겉옷을 찢는 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엄청난 재산의 손실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가 7일간이나 거지와 병자가 된 친구옆에서 함께 있어 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들은 욥에서 섣불리 조언을 하지도 않았고 욥이 충분히 고난 속에서 시간을 가지도록 하고 욥이 말을 하자 거기에 반응을 할 정도로 성숙한 인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하나님 경외 사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 잘하면 복을 받고, 잘못하면 징벌을 받는다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주의이고 우주의 이치인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사상을 가지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욥기 전체 42장중 3장에서부터 37장에 이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대화는 팽팽한 평행선을 그리며 서로 답답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시작은 너무나 좋았는데 왜 그런 결과가 밣생한 것일까요? 오늘날 교회 속의 관계가 이렇지는 않나요? 좋게 시작했다가 답답해지는 상황 말입니다.

친구들 이름의 뜻과 안타까운 관점들

우선 네 친구들과 관점을 살피며  이유를 살펴 보겠습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은 정금, 하나님은 심판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고 5장과 15장에서 고난의 원인은 죄에 있고, 인과응보임으로 회개를 촉구합니다.

빌닷은 논쟁의 아들이라는 이름 뜻을 가지고 있고  8장, 18장, 25장에서 전승과 자연현상을 통하여 흑백논리로 인과응보론을 설파하며 회개를 촉구하지만 욥이 회개하지 않자 그를 비난하고 저주합니다.

소발은 거친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11장, 20장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교리적으로 설며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엘리후는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32-37장에 이르기까지 자연현상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며 고난은 연단을 위한 것임을 말하지만 고난 중에 있는 욥에 대한 이해와 사랑 약하고 없고 욥이 듣지 않자 분노를 표출합니다.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그들의 말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다 구구절절 맞는 말입니다. 우선 그들의 말은 다 하나님의 경외 사상을 가지고 권선징악적 관점을 가지고 욥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들의 말이 너무 일방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과 독자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독자들은 욥의 고난이 욥의 죄 때문이 아니라 사탄의 시험에 의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네 친구들에 가장 주목할 사람은 엘리후입니다. 엘리후는 갑자기 32장에 등장하여 37장까지 긴 연설을 합니다. 엘리후도 위에서 살핀 것과 같이 세 친구들과 비슷한 관점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욥기 38장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친구들을 책망하실 때 그 리스트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먼저 길게 말한 세 친구들만 책망하실 뿐입니다.

엘리후가 주의 책망을 받지 않은 이유

그렇다면 엘리후는 어찌했기에 책망을 피했을까요? 세 친구들은 자신들의 배움과 경험을 중심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하나님의 영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  [욥기 32:8]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 | [욥기 32:18]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 [욥기 33:4]

엘리후는 세 친구와 비슷한 말을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한다는 것이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그런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책망을 하지 않으십니다. 세 친구의 말은 온전치 못함으로 그들은 용서받아야하고 희생 제물을 바쳐 제사를 지내게 하시지만 엘리후의 경우 그럴 필요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설교 vs. 비전 멘토링

이쯤에서 생각하는 것이 설교와 비전 멘토링에 관한 것입니다.

세 친구들은 나름 7일간이나 겉옷을 찢고 재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함께 울어 줌으로 요즘 말하는 상담자의 공감 능력을 잘 보여줍니다.  진정한 상담에 있어서 감정적 공감대 형성을 충분하게 합니다. 사실 세상 어느 상담가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들의 조언이 모두 욥에게 도움이 안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여기에서 몇 가지 생각해 보는 것은 사역자의 자세입니다.

첫째, 7일간의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 쓰고 욥과 같이 말은 안하면서 동행 한 것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진실을 다 알기 전까지는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욥의 친구들은 진실을 다 알지 못하는데도 마치 그것이 세상의 다인냥 말함으로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셋째, 말하기 전에 충분히 들어야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각 사람에게 있는 사건의 내막을 인간이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정답을 말해 줄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답답함을 들어 주며 답답함을 공감해 주는 것이 가장 위대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 엘리후를 통하여 배우는 것처럼 하나님의 종으로 무슨 말을 하려면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 받은 말을 해야함을 배우게 됩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종으로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할때는 일방적 설교가 아니라 비전 멘토링 방식으로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즉, 주님께서 각 성도에게 특수하게 주신 비전과 사명, 그리고 그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런 후에 멘토링 방식으로 먼저 충분히 듣고, 함께 공감을 나누며,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 받은 말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비전 파악을 통하여 각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고, 멘토링 방식으로 최대 공감을 나눔으로 힘과 위로가 나뉘에 지게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성경의 진리는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주신 천국에 들어가는 비전을 제시하기에 그 관점 속에서 모든 인간에게 합당한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각 개인에게 주신 특수한 비전과 각 개인이 처한 상황의 특수성이 있기에 일반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의 설교는 덜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나를 돌아봄

사역자의 한 사람으로 제 자신을 돌아 봅니다. 주님께 책망을 받고 우리가 한 사역에 대하여 희생 제물을 드리고 용서를 받아야할 상황은 아닌가? 욥의 세 친구의 열정과 열심은 특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책망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역자들도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열정과 열심은 특심이지만 그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도 없고, 타성에 젖은 방법론은 선택함으로 성도들에게 오히려 상처가 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비전 멘토링 칼럼, 지금까지 [욥기를 통해 배우는 비전 멘토링]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모쪼록 일반적이고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각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특수 비전과 사명, 특수 상황을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영에 근거한 깊은 지혜와 위로를 멘토링 방식으로 나눔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도들에게 전하고, 성도들이 이 땅에서 꽃처럼 피어나고 열매가 되고, 씨앗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샬롬, 승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