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비전 멘토링 칼럼, 오늘은 [예수님을 통해 배우는 새해 새 비전 완성법]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새해 사역과 사업의 비전 잘 설정하셨고, 잘 진행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이 믿음의 사람이고,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셨고, 더하여 무엇을 하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계시고, 더하여 하나님께 구체적인 비전을 받아서 정말 열심히 집중하며 그 일을 하시고 계시다면 주목하여 보십시오.
그렇게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 것같고 더하여 어떤 열매도 없는 것같고 더하여 일이 더 꼬이는 것같기만하고, 더하여 남보다 더 어려운 일들이 많이 생기는 것같고 더하여 가족들도 의심의 눈으로 처다보며 더하여 같이 비전의 일을 하던 사람 마저도 이제 불평을 넘어 비난하고 배반하려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위기를 느끼지는 않으십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더 갈 수 있을까? 답답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의 경우를 통하여 은혜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선 주님의 새해 계획은 크게 세 가지였을 것입니다. 첫째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준비 둘째는 십자가 이후에 자신의 비전을 계속 이어갈 제자들을 양육하는 것 그리고 셋째는 각 지역을 다니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순탄했을까요? 예수님이시니 순탄하셨어야 하겠죠? 그 능력과 그 지혜라면 못하실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신년 계획, 새 일이 그렇게만 전개 되었던가요? 사실은 놀랍게도 예수님의 사역은 사사건건 장애가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왜 동네 사람들에게 그렇게 “목수인 주제에”라는 식의 몰인정을 받으시도록 처신을 하신걸까요? 왜 동생들에게도 “잘난척을 하시려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하셔야죠”하는 식의 비난을 받고,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아 어머니 마리아와 더불어 형제들이 그를 잡으러 오도록 처신하신 것일까요? 무식한 그들은 그렇다손치더라도 말씀을 잘 아는 서기관들은 잘 설득을 시켰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성전의 의식을 잘 아는 제사장들에게는 존경을 받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같은 유대인 분봉왕 헤롯에게는 존경을 받도록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최소한 3년 반을 동거동락한 제자들에게는 이해를 잘 받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최소한 수제자는 부인을 하지 않고, 심복에게 배반당하는 것은 막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아니 구원자라고 오신 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을 피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예수님의 비전 완성과정을 보면 이렇듯이 일사천리로 형통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보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지혜와 치유에 감격하지만 각자 자신의 판단으로 예수님을 평가하면서 예수님의 비전 실현을 위한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였고, 예수님께서는 왜 일들이 그렇게 전개되도록 하셨을까요? 사실 여기에 깊은 비밀이 있고, 이 비밀이 우리의 새해 계획뿐 아니라 인생의 비전에 큰 지혜와 용기를 주게 될 것입니다. 전체적인 그림은 지금 있는 장애가 내가 부족하고 부르심을 받지 않아서가 아니고 오히려 그것이 비전 실현의 정석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었던 장애와 궁극적 비전 실현 과정은 크게 네 가지로 살필 수 있습니다.
첫째, 뿌리 깊은 인간들의 무식과 그 무식의 높이로 치솟은 교만과 죄성입니다. 나름 알고 있고, 나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일수록 그들이 알고 있는 것 외의 것들에 대하여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사장과 서기관이 그랬고 의로운 부자 청년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동기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세력을 잡으시면 좌우에서 그간 가족을 떠나 3년간 고생한 열매를 권력과 권세로 잡으려했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일들이 이렇게 꼬인 것에는 그런 인간들을 뒤에서 조정한 마귀의 간계가 있었습니다. 마귀는 금식하신 예수님께 직접 나타나 미혹까지 할 정도이니, 금식도 하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무식하기 그지없고, 교만하기 그지없고, 죄악이 가득하기 그지없는 인간들을 미혹하고 노예로 부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롯 유다에게 마귀가 들어가 예수님을 팔도록 합니다. 또한 마귀가 금식하신 예수님을 미혹하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돌을 떡으로, 절벽에서 뛰어 내리라 한 말을 사람들이 십자가 앞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이죠.
셋째, 예수님께서 신적 권세로 행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로 행하셨다면 십자가에서 죽지도 않으시고, 공생애 3년 반도 필요없으시고, 이 땅의 33년 삶도 필요없으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모세의 구약 때 행하셨던 비전 실현법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과 인간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목적을 실현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이번엔 다른 전략을 가지고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인간이 되셔서 인간이 겪는 모든 것을 겪으면서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존재목적을 실현하는 것을 보여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제자들이 그렇게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똑 같은 성정의 인간으로 금식과 기도로 삶을 드림으로 성령을 받으시고, 모든 사역의 시작에 아버지를 인정해 드리며 은혜를 구하시고, 사역 후에 조용한 곳에 가셔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삶의 모범을 보이심으로 아버지의 은혜를 어떻게 받으며, 어떻게 성령님의 은사와 열매를 유지할 수 있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여러분, 혹시 믿음과 비전으로 위대한 일을 품고 행하시는데 오히려 형통은 커녕 낙심되고 좌절스러운 일들만 있으신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에게서 배우십시오. 예수님께서 비전 실현을 위해 행하실 때 장애가 많았던 네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믿음의 일과 비전의 일을 행함에서 중요한 것은 그 일의 완성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하는 나의 완성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 완성점의 정점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 사역의 핵심이었지만 이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시기 전에 십자가에서 완성할 것이 하나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완성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은 위대한 십자가 비전을 실현하려는데 어찌 저 혼자만 이렇게 고통속에 버려두십니까?라고 말씀하시는 상황입니다. 결론은 주님은 그 고난을 고스라니 혼자 당하신 후에 “다 이루었다”라고 승리를 선포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 것 같은 상황에서 하는 나의 반응이 사실은 내 존재완성이라는 보석을 채집하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안하시는 상황일지라도 내가 진리, 믿음, 비전에 근거하여 온전히 행함으로 하나님 형상성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면적 하나님 형상이 완성되면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감당하는 외적 사명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완성하십니다.
그럼 우리가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십자가 예수님의 경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십자가 위에 먹구름을 두르시고 그 위에 바짝 붙어 계셨습니다. 우리 앞이 캄캄해 보일 때 그 속에 주님은 바짝 가까이에 계시며 우리가 완성되기를 응원하고 계십니다.
비전 멘토링 칼럼, 지금까지 [예수님께 배우는 새해 새 비전 완성법]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결론은 자명합니다. 믿음의 사람, 비전의 사람의 앞에 당연히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큰 장애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해결책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삶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 응답을 통하여 버림받은 것 같을 때에도 하나님을 붙잡을 때 우리가 하나님 형상의 온전함을 완성하고 비전의 형통은 그 이후에 성령님과 더불어 온다는 것입니다. 그후에 예수님의 비전 속에서 새 인류가 탄생하고 여러분과 제가 그 속에 있습니다. 믿음이 없고 비전이 없고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실망스러운 것일 뿐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요한복음 16장 33절의 말씀에서 지혜와 용기를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 요한복음 16:33
새해 새 비전의 일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여러분을 응훤합니다. 샬롬, 승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