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비전 멘토링 칼럼, 오늘은 [가나안 성도를 위한 새 교회 2_앤더슨과 오르티즈의 지혜]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저의 멘토 레이 앤더슨박사님과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박사님의 지혜를 살펴보며 말씀드리겠습니다.
30년전 미국 가나안 성 도를 위한 교회
어떤 이유로든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교회를 안 나간다하여 가나안 성도라고 부르는 분들은 오늘 날 한국 교회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가나안 성도의 개념을 1990년대에 접했습니다. 저의 박사과정 멘토 중에 레이 앤더슨 박사님이 계십니다. 그는 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 계셨던 유명한 조직신학자 2명 중에 한 분이셨습니다. 다른 조직신학자 콜린 브라운 박사님도 제가 무척 좋아했지만 앤더슨 박사님께는 매료가 되었습니다. 이유가 궁금하시지요? 다음은 그가 학생들에게 준 시험 문제의 예입니다. 이 문제를 들어 보시면 그 이유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신학교를 다니면서 부목사로서 교회에서 파트타임 사역을 하며 성경 공부를 인도하는데 어느 날 한 여인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1년 전에 중증 장애아를 출산했습니다. 그리고 3개월 전에 제 아이가 죽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은 그녀에게 주말까지 편지로 답을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그 목사로서 그녀에게 주는 편지를 써서 제출하십시오. 이 편지는 조직신학적인 내용으로 답하되 방식은 그녀의 상황과 나이, 신앙 정도에 맞추어 써야 합니다.
이것이 시험 문제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에 대하여 논하라가 아니라, 성도들의 삶의 정황과 연관시켜 생각하고 답을 주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딱딱한 신학이 아니라 치유학적 신학이 됩니다. 제가 앤더슨 박사님께 매료된 이유는 이와 같이 이분이 신학과 삶을 연결시키며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런 앤더슨 박사님께서 저에게 매료되셨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와 저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삶의 정황을 전체 속에서 파악하려 하는 점, 인간의 문제를 본질적이고 궁극적으로 해결하려 추구한 점, 그러다 보니 신학뿐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관심이 깊은 점, 그리고 그것을 도표로 표현하려 했던 점이었습니다. 그분은 조직신학자이셨지만 신학을 어떻게 하면 삶에 연결시키고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하셨습니다. 자연스럽게 풀러에 있는 심리대학원 교수님들과 함께 과목을 개발하시고, 목회에 적용하시려 노력하시고, 도표로 그것을 쉽게 표현하려 노력하셨습니다. 자신의 이론을 도표로 그리실 때 꼭 제 눈치를 보셨는데 제가 늘 쉽고 깊게 표를 수정해 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앤더슨 박사님께서는 저의 연구를 매우 관심가지셨고 박사 학위 논문이 나왔을 때 저의 논문은 자신이 읽은 논문 중 최고의 것이라 칭찬도 해 주셨습니다. 앤더슨 박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저의 논문은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장소적으로는 동양과 서양, 시간적으로는 고대와 근대와 현대, 인간적으로는 육체, 심리, 영성적으로 포괄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성경으로 재 해석하고 현실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앤더슨 박사에 대하여 설명한 이유는 그가 조직신학자이면서 인간의 치유에 관한 깊은 관심을 가진 목회자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는 90년대에 벌써 오늘날 우리가 가나안 성도라 부르는 교회를 안 나가는 성도들을 모아 교회를 만들고 섬겼던 분입니다. 사실 그때는 그런 개념의 교회가 너무 생소하여서 의아하게만 생각이 들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왜 어떤 상처를 가지고 교회를 안 다니게 되었었는지, 그래서 박사님은 어떻게 접근했는지에 대하여 깊게 묻지도 못했습니다.
20년 후에 찾은 답
감사하게도 가나안 성도들 문제에 대한 답을 그후 20년이 지난 2010년대에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의 친구이자 멘토인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박사와 교회를 안 나가는 성도들에 대한 이슈에 대하여 심각하게 대화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당시 미국 교회 영향력 1호였던 시카코 근교에 있는 윌로 크릭 커뮤니티 교회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가 했던 연구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연구는 윌로 크릭 커뮤니티 교회는 매년 많은 새 신자가 등록하는데 출석 교인의 숫자엔 변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론은 오래 교회에서 충성했던 성도들이 교회의 반복적인 메시지와 초신자를 초점으로 전도적 설교를 하는 것, 그리고 식상해진 프로그램들을 이유로 교회를 안 나가고 집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다른 교회에 간 것이었습니다. 앞 문만큼이나 뒷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영성과 제자훈련의 대가인 오르티즈 박사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핵심적 답을 주셨습니다. 교회에 문제점을 느끼고 교회에 안 나가는 성도들에게 그들이 문제시 삼고 있는 문제를 해결한 수 있도록 지도자로 활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르티즈 박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가정에서도 보면 자녀들이 자라서 청소년기만 되어도 자녀들은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평가하며 실망합니다. 어린시절에 부모를 우상으로 보았던 것에서 이제는 위선적인 것들을 우선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자녀가 자라서 부모가 되면 부모의 심정을 잘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교회에서 플로팅 성도, 가나안 성도들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교회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가 나가면 문제 교인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문제교인이 되고 교회를 나가기 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런 이유로 나간 그런 분들을 다시 교회로 들일 방법은 무엇일까요? 회개 기도와 금식, 영적 성숙과 화해 이런 것들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과 더불어 중요한 요소는 비전과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비전을 주시고 교회에서 그것이 발견되고 성숙의 과정을 거쳐서 실현하고, 그리고 다음 세대를 지도할 때 인간은 최고의 보람을 느끼며 하나님께 가장 온전한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회복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성도들의 비전을 발견하게 돕지 못하고, 발견했더라도 비전 실현을 위한 과정을 사랑의 눈으로 지켜 보며 지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비전에 맞추어 성장하게 하기 보다는 교회가 정한 프로그램에 성도들을 집어 넣으니 성도들은 어려움을 토로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그 동안 그런 사람들에게 교만해서 그렇다,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가치적인 평가를 하고 부정적으로 내 몰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교만과 불신앙에서 기인한 것은 훈육을 통해 성숙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말하는 것은 비전과 사명의 이슈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 대하여 각자의 비전 영역을 찾아 주고 그 분야에서 머리되고 꼬리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일입니다. 사실 이 일은 단순히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지도하여 지도자로 세우지 않으면 사역자들은 직무유기로 주님께 책망을 받을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군대에서 모든 병사들을 보직이 있는데 하나님의 군대에서 하나님의 용사들에게 비전적 보직을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이 비전적 보직은 단순히 집사, 장로와 같은 계급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잘 할 수 있도록 주신 비전 영역을 말합니다. 교회가 이것을 모든 성도들에게 찾아 주고 집중케하고 지도자로 세운다면 서로는 다른 사람을 비판할 시간이 없게 됩니다.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하여 집중할 것이고, 자기 분야에게 전문가가 되면 다른 전문가들을 존중하게 되며 서로 상보적인 관계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비전 멘토링 칼럼, 지금까지 [가나안 성도를 위한 새 교회 2_앤더슨과 오르티즈의 지혜]라는 제목으로 저의 멘토들인 레이 앤더슨 박사님과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박사님의 지혜를 통하여 대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앤더슨 박사님께서는 신학을 탁상공론이 아니라 삶에 깊숙히 연관시켜서 삶의 문제를 해결토록 하셨습니다. 오르티즈 박사님은 문제아의 능력을 지도력으로 승화시키도록 했습니다.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그들에게 부정적 성격을 고치라고 하기전에 그들이 지적하는 교회의 문제를 갱신할 수 있다면 교회도 건강해지고 그들도 당연히 돌아와 지도자로 설것입니다. 그날을 위하여 교회가 새롭게 되고, 그들을 위한 새 교회가 설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샬롬, 승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