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멘토링 칼럼 200

201.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가나안 성도를 위한 새 교회

샬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비전 멘토링 칼럼, 오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가나안 성도를 위한 새 교회 1]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플로팅 성도와 가나안 성도의 정의

2022년 11월 6일자 비전 멘토링 칼럼에서 우리는 [한국교회 트렌드 2023]라는 책에서 소개하는 플로팅 성도와 가나안 성도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칼럼으로 돌아가 정의 배경 구제책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정의

 플로팅 성도는 한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교회를 떠도는 성도들을 칭합니다. 가나안 성도는 영어로는 unchurched 즉 교회에 속하지 않는, 교회에 안나가는 믿음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플로팅 성도 현황

2022년 4월에 약 1500여명의 한국 성도를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주일예배를 드린 성도중 57.4%는 현장 대면예배에 참여했다고 답했습니다. 본 교회 현장 예배에 출석하지 않은 42%중 27%는 본교회 온라인 예배를 드렸고, 11%는 예배를 전혀 드리지 않았고, 2.3%는 다른 교회 온라인 예배를 드렸고, 가정예배, 기독교 방송 예배, 다른교회 현장예배 참석이 각각 1% 입니다.

즉, 이 수치는 11%가 교회를 안나가고 예배도 안드리는 가나안 성도가 되었고, 나머지 약 30%는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데 본교회 온라인 뿐 아니라 타교회 온라인 예배를 전전하는 플로팅 성도라는 것입니다.

플로팅 성도의 배경

플로팅 성도들이 이런 신앙 생활을 하는 배경을 두 가지로 분석하는데 선택 문화와 주관적 종교 큐레이터라고 봅니다.

첫째, 문화배경은 이제 온라인으로 설교와 예배를 선택하기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주관적 종교 큐레이터 subjective Religious Curator는 미술관 작품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처럼 자신이 선호하는 예배를 콘텐츠 별로 구분하고 기획하여 즐기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49)

결국 각 개인의 주관적 기호와 선택에 따라 예배도 선택하며 이곳 저곳을 떠도는 성도들이 코로나 펜데믹 이후에 트렌드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인 성도들의 배경은 무엇일까요?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이라는 책에서 저자 양희송과 [안 나가? 가나안!]이라는 책에서 저자 소강석은 그들이 교회를 안나가는 이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교회의 이중적인 모습에 실망
  2. 무조건적으로 믿음을 강조하는 것에 거부
  3. 기존 교회에 대한 의심과 불신
  4. 성도들간에 분열
  5. 지도자들에 대한 실망
  6. 개인의 삶을 간섭[1]
  7. 지나친 봉사와 훈련강조
  8. 교회내 권위적이며 비민주적 분위기[2]

[1] 양희송,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서울: 포이에마, 2014)

[2]소강석, <안 나가? 가나안!>(쿰란출판사)

 

구제방안

책은 이제 이런 플로팅 성도들은 교회가 원하든 아니든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그들을 신앙이 없거나 떨어진 사람으로 외면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성장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51) 그런데 가나안성도들을 다시 교회로 돌이키는 것에 성공하지 못했던 전례를 상기하면서 쉽지 않을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50)

이상이 [한국교회 트렌드 2023]책을 근거로 살핀 플로팅 성도와 가나안 성도들에 대한 2022년 11월 6일자 비전 멘토링 칼럼의 내용 요약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 플로팅 성도들의 미래는 무엇일까요?
  • 가나안 성도들의 미래는 무엇일까요?

이쯤에서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예수님의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에서 선택된 12제자들을 보내시며 하신 말씀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에 따르면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은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에 있지 않습니다. (10:5-6) 병든자, 죽은자, 나병환자, 귀신들린자 가운데 있고 (10:8), 하나님의 나라와 평안을 받을 만한 사람이고 제자들을 집에 받아들여 머물게 할 사람들 (10:7, 12)입니다.

그런데 듣다 보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고 하셨는데 들어보니 예수님과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좋은 사람들이지 바래새인도 사두개인도 아닙니다. 물론 병든자, 귀신들린자들은 어려움 속에 처한 분들이지만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먼저 영접하는 귀한 분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왜 주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라고 표현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크게 두 부류입니다. 첫쩨 귀신 들리고 병에 걸려 고통받고 죽어가지만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사람들, 둘째 하나님 나라와 주의 평안을 찾고 그것이 왔을 때 예수님과 제자들을 집에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시 제도권 회당 혹은 성전의 제사장들에게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함으로 도대체 나는 어디에서 도움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거지라고 생각하면서 혼돈 속에서 절규하는 사람들은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막연하지만 이것은 아닌데, 무엇인가 온전한 것이 있어서 나 같은 사람도 도와 줄 수 있는 그런 것은  없는가? 기존 회당과 성전에서 주지 못하는 더 온전한 것을 찾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으로서의 플로팅, 가나안 성도

만약 이런 생각을 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라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데 그 동안 다녔던 교회에서 해결받지 못하여 새로운 것을 찾으며 이곳 저곳을 방문하는 사람들, 혹은 더 온전한 것을 찾는 사람들이 오늘 날 플로팅 성도와 가나안 성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플로팅 성도와 가나안 성도는 삶의 상황은 어렵지만 마음이 순수하고 온전함을 추구하는 부류입니다.

그러나 플로팅과 가나안 성도들 중에는 자기 입맛에 안 맞는 교회를 배척하고 입 맛대로 샤핑하듯 교회와 설교자를 전전하는 어리석고 교활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이렇게 믿음의 광야를 방황하다가 마귀에게 잡혀먹히기 일보직전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런 분들 일 수 록 예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어둠에 영에 속하고 어둠 속에 속했던 사람이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성도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그런 성도들이 유리방황한다면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볼 때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예수님 입장에서는 이방으로 대표되는 마귀에 속한 사람들과 사마리아로 대표되는 배교한 성도가 아닌 이스라엘로 대표되는 성도라면 한 명도 잃을 수 없다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플로팅과 가나안 성도들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방법을 찾고 그들이 성령 충만하고 믿음 충만하여 기쁨으로 교회 생활을 하며 많은 이들과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을까요? 만만치 않은 일이라고 [한국교회 트렌드 2023]은 말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면 그냥 포기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게 우선적으로 가라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하지 않을까요?

비전 멘토링 칼럼 지금까지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 가나안 성도를 위한 새 교회 1이라는 제목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을 통하여 제자들이 전도할 우선 대상자를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오늘 날 개념으로 보면 플로팅 혹은 가나안 성도라 말해지는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성도이지만 기존교회에서 도움을 받지 못함으로 밖으로 돌며 적절한 도움을 찾는 사람들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교회라는 하나님의 축복 된 공동체에서 벗어나 밖에 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의 상황도 가슴 아프지만 그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교회의 상황이 또한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이라고 그들을 표현하시면서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가서 회복시키라고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그들이 회복되면 그들이 이스라엘 집 밖의 잃은 양들을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다음 주에는 이 가슴 아픔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히야 새로운 교회  차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샬롬, 승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