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십자가시리즈 7언_마지막 말의 비전

샬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비전 멘토링 컬럼, 오늘은 십자가 7  7번째 말씀에 대하여 [마지막 말의 비전]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혹시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들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마지막 순간이라면 여러분들은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누가복음 23 46절에서 다음과 같이 찾아볼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아버지 손에 영혼을 부탁하시는 겻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일 지라도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드리는 모습 속에서 숙연하고, 무엇인가 비밀스러운 느낌을 찾을 것입니다. 영혼이 죽음 이후에도 존재합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영혼을 받아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 뿐 만아니라 그 분이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사실들은 잘 생각하여 보면 모두 놀라운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들 외에도 더 놀랍고 심오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비밀,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는 것과 시편 31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아버지의 비밀

사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은 예수님 만이 아니었고, 예수님께서 처음도 아니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구약의 구절들이 있습니다.

시편 685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고아의 아버지” ( 68:5)라고, 그리고 시편 8926절에서는 나의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96절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태어날 한 아기라 또한 영존하시는 아버지” (이사야 9:6)라고 칭함을 받을 것이며, 이사야서 6316절에서 아브라함이 우리를 모를 지라도 여호와가 우리의 아버지” (이사야 63:16) 시기에 우리를 구속할 것이라고, 또한 이사야서 648졸애소 우리는 진흙이고 여호와는 토기장이 이며 우리 아버지” (이사야 64:8)라고 선포합니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예레미아서 34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빌어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예레미아 3:4) 라고 하나님을 부르며 간구할 것과, 319절에서 나를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 (예레미아 3:19) 아니할 것이며, 319절에서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예레미아 31:9)라고 선포합니다. 그 외에도 말라기 선지자는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야말하며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진작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것은 복음서 곳곳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40, 마가복음 5, 누가복음 35, 그리고 요한은 145회를 사용합니다. 이러 하기에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이 호칭은 그 당시로써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 모독죄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화 시키고 부정한 죄인화 시키는 차원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럼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제자들에게도 주기도문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가르치십니다.

 

큰 소리의 비밀

예수님의 십자가 7언의 마지막 말씀을 크게 하셨다는 것은 실로 놀랍습니다. 목요일 밤 성찬식과 세족식 이후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다가 잡히십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빌라도 법정, 헤롯 법정, 그리고 다시 빌리도 법정을 오가며 심문을 받고,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6시간 못박힌 채로 있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예수님께서는 기진맥진하셔서 죽어도 벌써 죽으셨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기진맥진하시기는커녕 큰 목소리로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시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힘이 없으셔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을 선택하시고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오후 12시부터 구름이 가득하여 어둠이 임한 상황이었기에 저녁부터 안식일로 접어들어야 하는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안절부절하고 있던 차였습니다.그래서 주님께서는 최대한 빨리 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앞당겨 주셨던 것입니다. , 죽음이 예수님의 삶을 통제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죽음을 통제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정황상 예수님께서 그렇게 일찍 죽으신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일반적인 경우 2-3일에서 길게는 1주일 동안에도 살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에 비하면 예수님의 빠른 죽음은 매우 의외입니다. 오죽하면 빌라도가 이상히 여겼을까요 영어 NIV 버전 성경은 빌라도가 놀랐다고 (surprised) 말할 정도였습니다 (마가복음 15:44).

 

시편 31편의 비밀

아버지께 영혼을 부탁하신 다는 이 말씀은 다윗의 시편 31 5절의 말씀을 완성하시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315절은 다음과 같이 다윗왕이 심한 고난 중에서 주께 자신의 영을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시편 31: 5).

여기에서 다윗은 심한 고난 중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서술합니다. 그러면서 그 와중에 자신의 영을 주께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하셨음을 찬양합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심한 고난가운데 있음을 고백하는데 이 상황은 십자가의 상황을 연상케 합니다.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이다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시편 31:11-13).

이 상황은 십자가 전후의 상황을 정확하게 예시하는 것입니다. 차이점이 있습니다면 이 시편에서 다윗의 고난은 진행형인 것에 반하여 십자가에서는 그것을 완성하고 끝을 내었습니다는 겻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편 31편을 인용하시고 이것을 완성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 말씀을 들은 이후에 시편 31편을 읽으며서 그 결론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시편 31:23-24).

 

예수님께서 시편 31편을 인용하신 이유는 우선 5절의 영혼을 주께 의탁하는 것의 적절성이 먼저이지만,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떠 받드는 다윗 왕의 시편을 완성한다는 것과 다윗의 결론을 제자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셨던 겻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영혼을 의탁하고 너희를 떠나지만 다윗의 시편대로 너희가 행하라는 겻입니다. 그리고 시편의 결론 대로 될 것이라는 겻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인생을 완성하시기를 원하시고, 어떤 마지막 말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닮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인간인 우리가 감히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답은 할 수 있다입니다. 우리는 그 증거를 첫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증거합니다가 돌에 맞아 죽는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사도행전 7:59)라고 말함으로 예수님께서 세우신 모범을 따릅니다. 그뿐 만이 아니다. 그는 이어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하고 죽습니다. (사도행전 7:60). 이것은 모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 형상의 완성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한 것이 그렇게 스데반 집사를 통하여, 그리고 그 이후에 많은 순교자들을 통하여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 열매들이 우리이며,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비전 멘토링 칼럼, 지금까지 십자가의 7언 중 마지막 말씀을 [마지막 말의 비전]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다윗왕의 시편 31편을 인용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변화를 발견합니다. 시편에서는 영혼을 주께 드리지만, 예수님은 이 주라는 호칭을 아버지로 바꿉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왕에게 주님이시지만, 예수님께는 늘 아버지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친숙함이 있으십니까? 예수님과 같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며 그것을 완성하시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스데반 집사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인용한 것과 같이 삶을 완성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모쪼록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리시는 삶을 사시므로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샬롬 승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