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멘토링 칼럼 220

220. 십자가시리즈 1언_용서의 비전

샬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비전 멘토링 컬럼, 오늘은 [십자가 용서의 비전]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시면서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34절의 다음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 함 이니 이다.

             예수님께서는 무슨 비전을 가지고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비전은 사명이 이상적으로 완성된 미래 모습을 오늘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이 말씀을 통하여 이루실 놀라운 미래를 미리 보시면서 기쁨과 간절함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비전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주시는 비전입니다. 그 비전을 온전히 알기 위하여 우리는 십자가의 실제 고통. 첫 말씀의 첫 단어,이 기도의 시점,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용서, 알지 못한다고 부인한 사람들에 대하여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오늘 칼럼은 저의 책 [크로스 코드]를 참고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자가 용서의 비전을 알기 위하여 …


첫째, 십자가의 실제 고통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시간은 현대 시간으로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그렇게 6시간 동안을 십자가에서 매달려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목요일 밤 성찬과 겟세마네 기도 후에 잡히시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의 모욕을 당하시고 빌라도와 헤롯 궁전을 밤새 오가시며 심문과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언덕까지 끌고 가야 하고, 손과 발에 못박혔어야 했고, 수직으로 세워져 몸무게로 인해 2중 3중의 고통을 감당하시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은 내리 쪼이는 낮의 땡볕과 밤의 추위에 몸을 떨아야 했습니다. 고통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피 냄새를 맡은 주변의 개미떼들은 온 몸을 기어 다니며 상처 속으로 들어갑니다. 까마귀들이 머리 위를 선회하면서, 때로 머리나 어깨 위에 앉아서 살을 파먹습니다.

십자가 형에 처한 사람들의 특징은 고통 자체가 너무 크기에 다른 것들은 신경조차 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고통을 호소를 하는 것입니다. 또 인생을 저주하면서, 자신을 죽게 한 사건을 원통해 하면서, 자신을 죽음에 처하게 한 모든 이들을 저주하고 증오합니다. 이 비명과 저주의 순기능은 극심한 고통을 잠시라도 잊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비명지르며 저주할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못박는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구하십니다.


둘째, 첫 말씀의 첫 단어에 대하여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 중 첫 마디는 “아버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그리고 아직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인간들에 대한 용서를 간구합니다. 신약은 그리스어로 쓰여 졌는데 그리스어의 특성 중에 하나는 강조하려는 말을 맨 먼저 쓴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칠언의 첫 말씀의 원어 순서를 보면 “파테르 아페스 (Pavter, a[fe”), 즉, “아버지여, 용서하소서”입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것을 먼저 하시고, 그 아버지께 저들, 자신을 죽이고 있는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첫 마디에 대하여 먼저 살필 것은 이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 첫마디는 넋두리가 아니었습니다. 아픔에 대한 호소도 아니고, 수치에 대한 모멸감과 분노의 표현도 아니었고,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늘 모든 일의 시작을 기도로 시작하였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뽑을 때에도,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푸실 때에도 (마가복음 6:41)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더구나 이 십자가는 그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미션을 완성하는 중요한 예식의 자리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셋째, 이 기도가 아니었었다면? 어찌되었을까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에 대하여 여러 차례 여러 심판을 하셨습니다. 에덴에서의 추방, 노아의 홍수를 통한 당시 인류의 말살, 언어의 흩으심,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등을 우리는 성경의 역사 속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 이 징벌적 심판들은 모두 인간들의 심각했던 죄악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의 죄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죄값이 어떠할 것이라는 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이 첫 번째 말씀을 통한 이 기도가 없었다면 인간들은 어찌되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넷째, 이 기도의 시점은 어떠합니까?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용서를 하지만 일반적으로 진정한 용서는 시간이 걸립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가 아물고 아픔의 기억이 약해지면, 그리고 자신의 악함도 기억하게 되면서 용서를 생각하게 됩니다. 진정한 용서는 진리 가운데 자신의 약함과 악함을 인정하고, 남들의 약함과 악함을 동시에 인정하는 가운데 성장의 과정속에 있는 인류로써의 동류의식을 느낄 때 나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는 다른 점이 있다. 지금 죽어가면서 자신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죽음의 현장에서 용서하고 계신 것이다. 이 말씀은 용서는 즉각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다섯째,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부탁하지 않은 용서를 하시는 것입니다.

상담자로써 제가 자주 들었던 질문 중에 하나는 회개하지 않은 자, 용서를 청하지 않는 자에 대해 용서를 하여야 하는가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용서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논리로 보면 용서를 청하지 않는 이를 용서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합니다. 쉽게 용서하면 또 그 가해자가 잘못을 행할 것이고 그렇다면 용서가 오히려 악을 키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두를 용서하십니다. 아무도 부탁하지 않은 용서였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은 용서였다.


마지막으로 구약과 신약을 대표하는 인류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십니다. 이 말씀은 놀랍게도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던 두 명의 중요한 인물들을 소환합니다. 창세기 4장 9절에서 가인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말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세기 4:9).

또한 누가복음22:57에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가인은 아담의 큰 아들이고, 베드로는 둘째 아담인 예수님의 수제자, 즉 영적 큰 아들입니다. 왜 하필 이들이 비슷한 정황에서 똑 같이 모른다고 부인을 할까요?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모른다고 했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으실 상황 그리고 자신도 붙잡히면 죽을 수 있는 정황에서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놀랍죠? 그런데 주님은 이 둘의 말을 꼭집어 그 둘을 용서하십니다. 가인은 구약의 모든 인류, 베드로는 신약의 모든 인류를 대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인류의 알고 모르고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용서를 구하시며 가지셨던 비전은 무엇일까요?

첫째, 노아의 홍수 때 보다 더 사악한 인류의 죄로 인한 멸망이 아닌 십자가 용서로 새롭게 탄생하여 감사를 드리는 여러분과 저를 비전 속에서 보신 것입니다.

둘째, 주님의 십자가 용서를 배워서 서로 복수함으로 서로를 죽이는 대신 서로를 용서함으로 서로를 살리며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여러분과 저를 비전 속에서 보신 것입니다.

셋째, 그간 인류는 이에는 이라는 복수 논리와 복수를 못하게 하기 위하여 씨를 말려야 한다는 사탄이 놓은 살인극의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용서를 통하여 인류가 그 사탄의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 자유케 되고 승리자가 되어 감격해하는 여러분과 저를 비전 속에서 보신 것입니다.


비전 멘토링 컬럼, 지금까지 [십자가 용서의 비전]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사명을 감당하시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지만 이 십자가의 용서를 통하여 완성하실 비전이 있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십자가 용서의 비전을 보면서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며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샬롬, 승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