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멘토링 칼럼 221

221. 십자가시리즈 2언_행악자의 비전

샬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비전 멘토링 컬럼, 오늘은 [십자가 행악자의 비전]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시면서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43절의 다음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은 잘 아시는대로 한 행악자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23:42)라고 한 간구에 응답을 주신 것입니다.

이 대화를 잘 살피면 각자의 비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행악자의 비전을 살피기 전에 우선 비전의 정의를 살피고 비전과 소망의 차이에 대하여도 살펴 보겠습니다. 비전을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오늘 보는 것이고, 이것을 하나님과 연관하여 설명하면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미래의 일을 우리에게도 알게 하여 미래를 보게 된 것입니다. 소망은 마음으로 무엇을 바라는 것이라면, 비전은 그 바라는 바를 오늘 미리 구체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과 비전은 조금 그 성격이 다릅니다.

 

행악자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비전 차원에서 살피면 이렇습니다.

행악자의 비전은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나라에 임하실 때 예수님께서 자신을 기억하여 주심으로 자신이 예수님의 나라에 함께 있는 모습입니다.

 

행악자가 예수님께 그런 말씀을 드렸을 때 이것은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것을 소망하여 말씀드렸을 때 그의 머릿 속에는 이런 비전이 이미 그려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나라에 임하시고 자신이 영광스럽게 그 자리에 함께 있는 모습이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응답으로 주신 비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행악자가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낙원에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행악자가 낙원에 있겠다 하신 말씀은 소망적인 것이 아닙니다. 나도 네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일을 오늘, 지금 말씀하여 그것을 비전으로 품게 하신 것입니다. 왜 낙원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추상적이지만 낙원은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의 머릿속에 쉽게 비전적 그림으로 그려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답은 놀랍게 비전적입니다. 행악자는 이 말씀을 듣고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는 것을 머리로 상상하며 비전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전이 주는 기쁨이 뇌를 지배하면서 마음으로 소망하면서 그 행악자는 십자가의 고통을 잊었을 것입니다.

 

즉 더 이상 그는 비명과 욕과 저주를 말하지 않아도 비전이 주는 기쁨 때문에 그 기쁨으로 나오는 옥시토신, 세라토닌, 엔돌핀과 같은 행복 호르몬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이 이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전은 이 행악자의 비전이 늘 하나님 나라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원래 비전은 무엇이고, 그의 비전이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의 비전을 알려면 그의 정체를 파악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행악자의 정체를 알려면 예수님 대신 풀려난 바라바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유월절에는 죄수 중 한 명을 풀어주는 관습이 있었고 마태복음 27장 16절은 바라바를 “유명한 죄수” 라고 소개합니다. 결국 예수님 대신 그가 풀려 납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였을까요? 전승에 의하면 그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구하려던 열심당원의 주모자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은 바라바의 열심당원 동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유는 십자가 형은 로마에 대항한 사람이나 살인자 등 매우 죄질이 안좋은 이들에게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행악자가 잡히기 전까지 그의 비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의 해방을 소망했고, 해방된 나라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비전으로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당원이 되었고, 열심당에서 지시하는 무장봉기를 로마군을 상대하여 벌였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잡혀왔고, 이제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어가면서 그의 소망과 비전이 바뀝니다. 십자가에서 그가 가진 소망은 십자가의 상황에서 벋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비전은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땅에서 누워 쉬며 목을 축이는 모습입니다. 행악자는 이러한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 기록이 성경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15:24-32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지나가는 자들, 대 제사장들, 서기관들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고 말해 줍니다.

앗, 그런데 기록의 내용이 좀 불손합니다. 왜 그럴까요? 두 행악자들이 예수님께서 능력자라는 것을 알고 처음엔 분명 공손히 간절하게 구해달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무 기적도 행치 않으시자 행악자들이 당황하고 그것이 욕과 저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3:35-39에서는 백성, 관리, 군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을 비방하는데 행악자들의 입장에 변화가 생긴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해 줍니다.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마가복음은 분명 행악자들, 즉 두명이 같이 예수님을 욕했다 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두 행악자중 한 명은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된 것을 기록합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다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은 마가와 누가가 같은 사건을 어디까지를 기록하려 했는가의 이슈입니다. 즉, 마가복음은 그들이 같이 욕했다는 시점까지만 기록한 것이고, 누가는 그 이후 한 명의 행악자가 심경의 변화를 가졌다는 시점까지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점은 무엇이 그로하여금 심경의 변화를 가져오게 했는가입니다. 그의 변화는 그의 말에서 찾아보아야 합니다.

 

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회개한 행악자는 우선 자신의 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신은 죽어 마땅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모든 것이 옳다고 인정하면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이것을 알았을까요?

 

혼적인 해석은 이 사람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구하려던 열심당원 중에 한 명일 수 있고, 그들 중 한 명인 가롯 유다를 통하여 예수님의 행적을 들어 알 수 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들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속에 비명과 저주를 퍼 부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고 있는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옆에서 보면서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신 것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영적인 해석은 그가 십자가에서 죽어서 영적 세계에 갈 때가 되자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영적 눈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아 차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양옆에 두 행악자는 양과 염소로 구분되는 두 종류의 인류를 상징합니다. 인류는 어차피 행악자, 즉 죄인이라는 것이고 정죄 받아 죽을 운명임을 또한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앞두고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회개하여 낙원에 가는 사람도 있고 그냥 죽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비전 멘토링 칼럼, 지금까지 십자가 행악자의 비전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제자들이 다 도망간 상황에서 회개한 강도는 제자들도 3년 반을 따라 다니며 어려워 했던 십자가 구원의 비밀을 체험하며 예수님의 낙원행을 동행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아무 기적도 행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든 회개한 사람을 낙원으로 인도하시는 최대 기적을 행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십자가를 진 것 같은 삶일 수 있지만 그 십자가를  나를 위하여 지신 예수님을 만나고 동행하며 낙원에 대한 비전에 사로잡히면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며 삶을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그런 삶 완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샬롬 승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