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멘토링 칼럼 19

19. 혼돈스러운 비전과 사명의 정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비전 멘토링 칼럼 오늘은 “비전과 사명은 같은것인가 다른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내용은 비전에 대하여 종합적인 이해를 돕고, 비전을 찾게 도움을 주는 책,
비전의 서: 비전있어?라는 책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멘티가 질문하고 멘토가 답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대화 형식으로 풀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멘토여, 솔직히 저는 비전과 사명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비전과 사명은 참 아름답고 고귀한 말이다. 비전이라는 말은 미래적이고 고상해 보인다. 사명도 무엇인가에 대한 헌신, 집념, 열심을 가진 어떤 영웅적 사람을 연상시키며 우리를 흥분 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비전과 사명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면 가슴이 뛰고 미래지향적이며 열정적이 된다. 비전의 사람이 나타나 우리를 감동시킬 것과 사명의 사람이 나타나 위대한 일을 해주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우리를 슬프게 할 수 있다.

  • 당신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남들의 비전 때문에 달콤하고, 흥분되는 부분은 거기까지 이다. 갑자기 그 질문의 방향이 나에게로 향할 때 당황스럽다. 갑자기 답답해진다. 나의 비전? 무엇인가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당당히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숨이 막힌다. 사명도 마찬가지다. 누가 나에게 사명에 대하여 묻는다면 그것도 막연해 진다. 물론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사명과 연관된 삶이었나? 나의 사명은 뭐지? 라고 질문하게 된다. 그런데 다음 질문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 비전과 사명의 정의를 아십니까?

사실 비전과 사명의 정의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비전이나 사명 중 한 가지만 물어보면 그나마 무엇이라도 말하겠는데, 비전과 사명을 함께 물어 보면 그게 그것 같고, 혼돈스러워진다. 그런데 우리를 더 슬프게 하는 질문이 있다.

  • 비전과 사명의 차이를 아십니까?

어, 그거 같은 거 아니었나? 최소한 비슷한 거 아닌가?  이 두 가지가 다른 것인가? 꼭 그렇게 달라야 하는 것인가? 이쯤 되면 비전과 사명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지 않게  된다. 왜 이런 혼돈이 올까?

그 이유는 우리가 비전과 사명에 대하여 막연하게 동경하고, 좋게 생각하지만
한 번도 구체적으로 배우고, 깊이 있게 파악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비전과 사명을 말하는 학자와 이론가들이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이론과 설명으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기관들이 비전과 사명을 표어처럼 기업 백서나, 웹페이지에 써 놓고 있지만 비전과 사명의 차이를 알고 쓰는 곳은 많지 않다. 그런 경우 그 비전과 사명은 백서에, 회사에, 학교에, 교회에 걸려 있는 형식적인 말일 뿐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그러나 제대로 된 비전과 비전 선언문은 그 소유자와 공동체에게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강력한 에너지를 준다.  그대는 이 차이를 알게 될 것이다.

  • 멘토여, 꼭 비전과 사명을 구분하여 알아야 합니까?

물론, 비전이든 사명이든 둘 중에 한 가지라도 알고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살기만 해도 그렇지 않은 삶보다는 좋을 것이다. “비전/사명 선언문”이라고 구분하지 않고 쓴 것이 있는데 그래도 없는 것 보다 훨씬 좋다. 그러나 그런 구분을 모르고도 그 정도 산다면, 그것을 구분한 후에는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비전과 사명은 너무나 다른 것이다. 물론 방향은 같다. 그러나 비전이 해주는 것과 사명이 해주는 것은 다르다. 다음 기회에 더 자세히 살피겠지만 간단하게 살핀다면 비전은 목적지에 관한 것이라면, 사명은 그곳에 가는 것에 관한 것이다. 당나귀 앞에 당근을 매달고, 이따금 채찍질하며 가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이 때 비전은 당나귀 앞에 있는 당근과 같은 것이다. 사명은 채찍질하며 그곳에 가는 것과 같다. 즉, 사명은 죽음을 무릎쓰고 감당해야 할 일에 관한 것이다. 비전은 그 사명이 끝나면 받는 당근과 같은 것이다. 그럼 이것을 왜 구분하여 알아야하는가?

당근과 같은 비전을 보면서 가는 사람은 늘 기쁨이 충만하여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쁜 비전을 모르고 그냥 사명만 감당하는 사람은 마치 당근없이 채찍만 맞는 당나귀와 같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들이 사명만 강조함으로 의무적으로 기쁨없이 일하다가 탈진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은 비전과 사명을 우리가 달리 그리고 함께 알기를 원하신다.

  • 멘토여, 그러한 증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당연히 성경에서 이렇게 말하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예를들어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모든 것을 팔고 나누어 준다음에 예수님을 따르라 했다. 그래서 그의 사명은 자신 모든 것을 팔고 남들에게 다 준 다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었다. 이 사명을 그 부자 청년은 끝내 감당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사명이 너무나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왜 힘들었을까? 그 일을 완성했을 때 누릴 수 있는 것을 비전으로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인하여 물고기를 풍성하게 잡은 이후에 예수님을 따르라 했을 때, 배를 놔두고 예수님을 따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르면 어떤 비전의 축복이 있는지를 비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3:14절에서 내가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면서 달려간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성공적인 사역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었다.


이 방송을 듣는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사역에 기쁨이 충만하십니까? 삶에 기쁨이 충만하십니까?

이런 복을 알고 받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적 비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비전을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럴때 믿음이 완성되어 형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많은 성도들이 부자 청년과 같이 비전을 모르기에 교회가 말하는 사명을 행하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모쪼록 비전의 서: 비전 있어? 라는 책도 구하여 읽으시고, 비전 멘토링 세미나도 참석하셔서 예비된 축복을 받으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