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비전 멘토링 칼럼, 오늘은 [프로이드, 프랭클 그리고 비전]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질문
우선 다음을 들으시고 여러분은 동의하시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굶주림에 시달리도록 해 보자. 배고픔이라는 절박한 압박이 점점 커짐에 따라 개인의 차이는 모호해지고, 그 대신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표현하는 단 하나의 목소리만 나타나게 된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이 말을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사흘 굶어 담 아니 넘을 놈 없다”갈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 굶주리게 하면 개인차이는 모호해지고 허기를 채우려는 단 하나의 목소리로 통일 될 것이라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 말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4주째 살피고 있는 빅토 프랭클 박사입니다. 그는 왜 이 말에 반기를 든 것일까요?
위에 인용한 말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Men’s Search for Meaning이라는 제목의 프랭클 박사의 책에서 나오는 것으로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 정신분석학의 시조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주장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로이드의 말에 동의를 할 것입니다. 프로이드가 이렇게 주장한 것에는 인간에 대한 일반적 관찰과 학문적 관찰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 관찰이라하면 사흘 굶어 담 아니 넘을 놈 없다는 말과 같이 속담이 증명합니다. 모두가 동의한 다는 것입니다. 학문적 관찰이라하면 프로이드 학문의 기초에 근거합니다. 프로이드는 다윈의 진화론을 읽고 큰 감동을 받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 진화의 산물이고 다른 생명체와 유기체와 같이 화학적 물리학적 법칙에 지배받는 기계와 같은 존재로 본 것입니다. 그러니 배가 고프면 몸의 세포들이 양분을 필요로 하고 화학적 물리학적 법칙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담을 넘게 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프랭클의 반론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프랭클 박사는 반론은 제가히는데 그는 왜 그리고 어떻게 반대할까요? 그의 책에서 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확인해 보겠습니다. 인용의 시작합니다.
감사하게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 일어난 일을 몰랐다. 그의 환자는 빅토리아풍으로 호화롭게 디자인된 침상에 누워 있었지 아우슈비츠의 오물더미 위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말과는 달리 강제 수용소에서는 ‘개인적인 차이’가 모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차이점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가면을 벗고, 돼지와 성자의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그런 것을 경험한 후 우리는 더 이상 ‘성자’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됐다. 나는 맥시밀리언 콜베 신부를 생각한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다른 사람 대신 죽음을 자처하여]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결국 석탄산 주사를 맞고 살해됐다. 그리고 1983년에 성자로 추대됐다.
여러분은 원칙에 어긋나는 예외적인 경우만 들었다고 나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
여러분은 우리가 굳이 ‘성자’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저 ‘훌륭한’ 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소수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소수의 반열에 합류하려는 도전 의지를 본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지금 아주 좋지 않은 상태에 있고, 우리 각자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더욱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334-335/340)
여기까지가 프랭클 박사의 글 인용이었습니다.
프랭클 박사는 프로이드가 말한 모두 똑같이 굶주림에 시달리도록 하면 밥 달라는 단 하나의 목소리만 나올 것이라고 말한 상황의 최악 지옥편을 살아본 사람입니다. 그곳은 매일 최악의 의식주와 동물보다 못한 인격적 대접을 받으며 최악의 노동을 하다가 영양실조에 걸려 허약해지면 가스실로 보내 죽게 만드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7개월을 살면서 돼지와 성자로 구분되는 두 가지 인간을 봅니다.
두 부류의 인간형
돼지는 바로 프로이드가 말한 부류입니다. 유대인으로서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빵 한 조각이라도 더 먹고, 힘든 노동을 최대한 피하려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나치의 인정을 받아 유대인들을 통제하는 나치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중에 포악하고 간악한 이들이 나치의 앞잡이가 되어 간수로서 나치보다 유대인들을 더 악랄하게 취급한 사람들이 많았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수용소에는 성자라고 표현한 사람들이 있는 것을 또한 목격합니다. 언급된 맥시밀리언 콜베 신부는 유대인도 아닌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의 아버지는 독일계 폴란드인, 어머니는 순수 폴란드인이었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제였는데 2차대전 때 2천여명의 유대인들을 자신의 수도원에 숨겨주었습니다. 그것이 1941년 2월 게슈타포에 발각되어 반역죄로 체포되어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것입니다.
1941년 7월 말에 죄수 중 한 사람이 사라졌는데 탈옥이라고 생각한 간수장에 경고를 주기 위하여 죄수 10명을 처형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선택된 죄수 10명 중에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미 나치에 의하여 모든 가족이 몰살 당했습니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던 콜베 신부는 그 대신 자신이 죽겠다고 자원합니다. 나치 장교는 그런 그의 인류애에 움찔하고 총살 대신 뽑힌 10명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물과 음식을 주지 않도록 했습니다. 콜베 신부는 감옥 안에서 기도하면서 갇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렇게 3주가 지났는데도 콜베신부와 3명은 기도의 힘으로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자 나치 장교는 페놀 주사를 놓아 그들을 살해합니다.
이 장면에서는 요한 계시록 6장 10-11절이 떠오릅니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그들의 금식기도와 죽음이 응답되었을까요? 그들이 죽은 것은 1941년 8월 14일, 그리고 아유슈비츠는 한 달 후에 폐쇄되고 전쟁이 그칩니다.
의미의 참된 의미
그렇다면 무엇이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돼지와 성자를 구분했을까요? 프랭클은 이것이 의미라고 봅니다. 그 의미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의미가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봅니다. 콜베 신부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믿음, 둘째는 사랑의 가치, 셋째는 비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알고 계시고 적절히 응답하실 것이라는 믿음,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사랑하셨을 것이라는 사랑, 그리고 곧 하나님께서 이 수용소의 부정의를 정의로 고치실 것을 비전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때에 그것이 일어나지 않아도 기필코 그 비전이 실현될 것을 믿고 행동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프로이드가 인간을 유기체적 기계로 보고 굶으면 모두 똑같아진다고 주장한 이론에 대하여 프랭클이 반론을 제기 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랭클 박사는 어떻게 하여 이런 것을 주장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놀랍습니다. 그가 살던 오스트리아는 이미 정신분석학의 시조 프로이드, 그리고 개인심리학의 시조 아들러가 양대 산맥으로 자리를 잡고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프로이드는 프랭클 보다 49세 많았고, 아들러는 35세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20세에 프랭클은 두 거장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두 거장이 주장한 인간 행동 동기 요인인 욕망과 열등감은 마치 카인이 살인까지 행했던 행동요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랭클은 그런 육체적 사회적인 것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더 고귀한 의미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비전 멘토링 칼럼, 지금까지 프로이드, 프랭클 그리고 비전이라는 제목으로 프랭클 박사가 주장한 인간 행동의 근본적인 동기가 프로이드의 욕망, 아들러의 열등감을 넘어 프랭클의 의미에 있다는 것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의 참된 근거는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에서 온다는 것을 살폈습니다. 오늘날 돼지를 추구하는 이들의 이론이 있고, 성자를 추구하는 이들의 이론이 있습니다. 분별하시면서 택함을 입은 Son and daughter of God, Servant for Jesus, Saint by the Holy Spirit의 3S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시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