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십니까?
Merry Christmas!! 비전 멘토링 칼럼 오늘은 2020년 크리스마스 주일을 맞이하여서 예정하신 하나님,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선 2020년 우리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오늘 날과 예수님 탄생 시절을 비교하면서 크리스 마스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어제 12월 19일에 한국 대전광역시 유성에서 매 4일과 9일에 서는 5일장을 방문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5일간 드실 상추, 양파, 들기름을 발라 즉석에서 굽는 김 3봉지, 서리 맞은 애호박 두개를 샀습니다. 그리고 장에 갈 때 마다 보기만 했던 오뎅국물과 순대, 떡볶이, 그리고 씨앗 호떡도 먹어 보았습니다. 날씨가 매우 추워져서 그런 군것질을 하기엔 참 적절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시장 할머니들의 손 발이 어시는 것 같아 참 보기에 가슴 아팠습니다. 그 할머니들께서는 누군가 나타나 자신이 가져온 것을 빨리 팔고 집에 들어가서 따뜻한 국을 가족과 나눌 생각이 간절히 하셨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때도 정황상 추울 때라고 봅니다. 그 정황은 유월절에 희생 제물로드릴 양들을 예루살렘 변방에서 키우는 것입니다. 유월절 봄이 올 무렵엔 양 도둑들이 많기에 누군가 24시간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 겨울에 방이 없이 마구간 말 구유, 즉, 통나무를 깎아 만들었을 말 먹이통에 누인 예수님과 산고를 거치고 누우셨을 어머니 마리아의 고통을 추운 유성장에서 몇 천원, 즉 몇 불을 벌기 위하여 고생 하시는 할머니들 속에서 보았다면 너무 속된 표현일까요?
2020년 올해는 교회의 통치는 약화되고, 국가의 행정 명령이 교회와 예배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가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라면 드릴 수 있고, 못드린 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서, 혹은 숨어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상황도 영적, 종교적 권위가 땅에 떨어져서 어용들이 지식적, 전통적, 관습적 희생만 드리던 시대였습니다. 선지자 말라기에게 말씀이 임했던 때부터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시점까지 약 400년간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400년간을 기다려도 구원이 임하지 않았고 대신 앗시리아, 베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식민지로 이어지면서 이스라엘은 식민 속국으로 자유없이 살았습니다. 로마가 이리하라면 이리하고, 저리하라면 저리해야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베들레헴의 상황도 가이사 아구스도가 행정명령을 내려서 모든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 등록을 하도록 했습니다. 정확한 세금을 거두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간 이유는 그래서 영적,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로마의 행정 명령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가이사 것을 가이사에게 드리는 차원에서 방역을 위해서는 방역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주님 것을 주님께 드리기 위하여 우리의 영성을 활짝 열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에 큰 혼돈이 있다고 봅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믿기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으니 마스크를 쓰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님께서 지키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동하던 많은 이들이 안타깝게도 코로나 양성 반응이 나오면서 한국과 미국에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말씀은 틀린 것인가요? 잘 분별해야 할 것은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 상황은 성령님과 함께 하며 성령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목숨을 거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맹독 독사에게 물리고도 죽지 않았던 상황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종교심에 근거하여 성전이 지켜주고, 성궤가 지켜주고, 성경이 지켜줄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술적인 기독교로 전락한 모습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에 둔감해지고, 아전 인수격으로 말씀을 오해하는 것은 오늘이나, 그때나 동일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대에도 하나님의 뜻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서를 쓴 말리기 선지자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400년간의 긴 침묵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침묵을 깨트린 곳은 그 해에 순서에 따라 대제사장이 된, 자식이 없어 늘 수심에 찾던 그러나 의로운 노인 사가랴가 하나님께 향을 바치며 기도를 드리던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였습니다. 그리고 사가랴와 폐경이 온 할머니 엘리사벳에게 예수님의 길을 예비할 아들 요한이 잉태됩니다. 400년간 하나님의 음성이 임하지 않았던 성전에, 노년까지 자식에 대한 기도 응답을 받지 못했던 사가랴에게 예상치 못했던 응답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아들을 주시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400년간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침묵을 깨트릴 뿐 아니라, 창세기 3장 15절에서 선포된 구원자의 오심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는 놀라운, 예상치 못할 일이 시작된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아직 남자와 성적 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것 뿐 아니라, 아직 어린이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이를 갖기에 늦은, 마리아는 아이를 갖기에 이른, 두 불가능이 가능하게 변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예상치 않은 것들은 그것 만이 아닙니다. 구주의 나심은 오직 성경에 기록된 것이라 오직 그 기록을 가지고, 믿은 유대인들만이 이 비밀을 알고 기다리며 준비했어야 했는데, 정작 그들을 모르고, 그들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동방의 박사 3명은 유대인의 왕이 태어날 것을 알고, 믿고, 선물까지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베들레헴으로 찾아 옵니다.
또 예수님의 탄생 속보를 직통 계시로 들은 이들이 있는데 이들도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속보이면 그 해의 대제사장에게 먼저 전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대제사장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제사장, 혹은 경건한 에세네파, 바리새파 장로들에게 전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천사들이 하늘 문을 열고 달려 나와 만난 이들은 그런 교계 지도자나 장로들이 아니었습니다. 베들레헴 근처 들녘에서 밤에 양을 치던 목동들에게 였습니다. 왜, 목동들이었을까요?
그 목동들은 일반적으로 곧 다가올 유월절에 각 가족별로 희생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바쳐야 할 양들을 돌보던 종들이었습니다. 유월절에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할 양들을 양육하는 목동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목동은 양을 전제로 하고, 베들레헴 광야의 목동은 희생제물로 바칠 양을 돌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목동들에게 희생양으로 이 땅에 오신 어린양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양들에게는 이제 너희들이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지 않아도 된다는 양들의 구원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단번에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실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쯤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의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그리고 목동들은 희생양으로서의 정체성을, 베들레헴은 빵집이라는 뜻으로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려 주기 위한 예정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비전 멘토링 칼럼, 지금까지 우리는 예정하신 하나님,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첫 크리스마스와 2020년이 지난 크리스 마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날에도 주님께서는 예정된 비전을 예상치 못했던 때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들을 통하여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대형 교회를 섬기시면서도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섬기는 영성 깊은 목사님도 계시겠고, 성공한 사업가이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에 감격하여 늘 어려움 속에 있는 성도와 인류를 섬기며 자신은 무익한 종이라고 가슴을 치는 집사님들과 장로님들도 있을 것이고, 이번 코로나로 인하여 사업과 가정 경제가 너무나 어려워 가슴을 치며 눈물로 주님께 나가 구원을 간구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모쪼록 주님의 그 예상치 못한 은혜를 체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순결하고 절박한 영적 민감도를 가지고 주님께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의미있는 성탄절 맞이하시기를 우리를 위해 보좌를 버리시고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