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멘토링 칼럼 66

66. 미국과 한국의 코로나 방역 경험 일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비전 멘토링 칼럼 오늘은 미국과 한국의 코로나 방역 경험 일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다음 글을 유의깊게 읽어 보십시오.

“모든 상행위는 멈추었고, 모든 고용도 멈추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코로나 사태에 대한 소식처럼 들리지만 계속 들어 보십시오.

“일과 빵도 가난한 자들에게는 사라져갔다. 처음에 가난한 자들의 울부짖음은 듣기에 너무나 비애스러웠다. 런던에서 머물러야 했던 수천명은 절망이 그들을 사로잡고, 길가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까지 죽음의 메신저 역할 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i]

이것은 오늘 날의 뉴스가 아니라 약 400년 전에 소식입니다. 로빈슨 크루소라 Robinson Crusoe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영국의 소설가 대니얼 디포 Daniel Depot가 1665년 역병의 일기 A Journal of the Plague에서 전한 상황입니다. 당시 흑사병으로 런던이 초토화 되던 때였습니다.

오늘은 제가 지난 한달 반 동안 경험한 미국과 한국의 코로나 방역에 대한 경험을 나누고 그 차이의 이유를 살피겠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모시면서 비전 멘토링에 관련한 시리즈의 책들을 마무리 하기 위하여 지난 7개월간 한국에 머물다가 미국의 가족과 멘티들을 살피기 위하여 1달 여 미국에 입국했다가 지난 16일 주일에 한국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비전 찾는 강의와 강의에 사용할 책들을 출판하기 위하여 다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우선 한국에서 미국에 들어가는 여정을 살피겠습니다.

  1. 7개월 만에 가서 본 미국
    1.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내 특이한 풍경은 한 줄에 한 명씩을 앉히는 것이었습니다. 여행객의 숫자가 줄어든 까닭과 방역에 대한 이유였습니다.
    2. LAX에 들어서면서 어떤 현실을 맞이할까 호기심 가득한 채 비행기에서 내렸습니다. 그러나 LAX에서는 방역 조치에 대한 권고를 주는 앱에 들어가 확인하라는 홍보물 외에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LAX를 나가면서도 방역에 관계된 어떤 특이점도 없었습니다.
    3. 특별한 경험은 아내가 확진자와 잠시 접촉을 하여서 말로만 듣던 진짜 격리를 긴장감 속에서 했어야 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감염이라는 정의와 실체가 피부로 느껴지던 상황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마스크를 쓰고 만났던 아내 덕에 감염은 없는 것으로 검사결과가 나와서 안심은 했지만 감염자들이 느낄 당황함과 위기감을 잠시라도, 조금이라도 알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4. 그래서 미국에서 멘토링 모임을 가질 때에도 마스크를 쓰고 2미터 거리를 두고, 공원에서 만나려 하는 노력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병마에 대하여 주님께서 해주실 일을 해주시겠지만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5. 7개월 만에 방문한 방송국에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는 것이 변화된 점이었습니다. 페티오가 있는 식당에서 몇 차례 그리운 음식을 먹을 수 있던 것은 작은 기쁨이었습니다.
  2. 그렇게 1달 여를 머물다가 다시 한국에 돌아 왔습니다.
    1. 텅 빈 공항 정경 때문에 천하의 LA 국제 공항이 마치 시골 공항 같았지만, 검역대를 몇 분만에 빠져나간 것은 코로나가 준 축복이었습니다. LAX에서도 식당들은 문을 닫았고, 모든 직원들은 마스크와 얼굴 쉴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검문대를 지나기 전에 온도를 측정하고, 비행기를 타기 전에 온도를 확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방역에 대한 긴장감은 감지 할 수 없었습니다.
    2. 그러나 그 긴장감을 확 느끼게 한 것은 아시아나 비행기에 들어간 순간이었습니다. 승무원 모두가 그들의 수려한 정장 위에 일회용 겉옷을 입고 마스크를 착용한 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좌석은 역시 가족 이외에는 한 줄에 1명씩 앉았고, 8월이면 성수기인데도 불구하고 빈 자리가 많았습니다.
    3. 비행기가 인천 공항에 도착하면서 과연 한국의 방역은 어떠한지 궁금했는데 한국 정부는 그것을 뼛속 깊이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4.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내내 마스크를 썼어야 했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마스크를 써야 하기에, 여분의 마스크를 가지고 교체하시기를 추천합니다. 비행장을 빠져 나와 집에 올 때 까지 이마의 온도를 몇 번 측정했는지 모릅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내국인과 외국인으로 구분되어 줄을 썼고, 차례가 되자 마스크에 얼굴 쉴드를 한 육군 군인들이 머물 곳을 전화로 일일이 확인하고, 휴대폰에 행정안전부에서 만든 자가격리 확인 앱을 설치와 등록을 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집으로 가기 위하여 누가 공항에 마중을 나오는지, 혹은 대중 교통을 이용할 것인지도 중요하게 물었습니다.
    5. 그 뒤로 3곳을 거치면서 방역과 검역을 받고 서야 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짐을 찾고 나오자 저는 대전 유성으로 가야해서 대중 교통을 이용했어야 하는데 안내자들이 지역별로 구분하여 인도했습니다.
    6. 인천공항에서 각 도시로 가는 버스는 방역을 이유로 운행 금지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국자 전용 버스를 이용하여 광명역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참고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실 분들은 인천공항에서 식사를 하실 것을 권합니다. 공항을 떠나면 식당이 없고, 긴 대기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7. 인천에서 광명역으로 가는 버스를 약 30분간 기다렸고 광명역에서 대전으로 가는 KTX를 약 1시간 정도 기다렸습니다. 기차는 입국인들의 숫자에 따라서 두 세칸의 객실을 특별히 구분하여 일반 승객과 섞이지 못하도록 철저히 구분하였습니다. 대전역에 내리자 안내인들이 입국인들을 역 밖에 있는 전용버스 대기 텐트로 인도했고 집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8. 집에 와서의 격리는 다른 방에서 다른 화장실을 쓰고, 식사를 같이 하지 않고, 마스크를 쓰고 멀리 떨어져서 대화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다음 날 보건소에서 전화가 와서 코로나 검사 할 스케줄을 잡아 주었고, 또 구청에서는 택배로 쌀 한 포, 큰 물 6통, 라면 1박스, 인스턴스 밥과 햇반을 보내 주었습니다. 또한 일회용 온도계를 보내주어 매일 앱을 통하여 온도와 이상 상황을 보고하는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9. 선별 검역소에 가니 마스크와 얼굴 쉴드, 일회용 원피스 옷으로 몸을 감싼 간호사들이 더위에도 수고를 하고 있었고, 입과 코에 면봉으로 체액을 채취하였습니다. 다음날 음성이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LA의 검사보다 철저했고 결과 보고는 빨랐습니다. 음성이 나와도 입국인들은 2주간을 여전하게 집에서 격리를 해야 합니다.
    10. 한국에서 방 한 칸에 격리되어 있는 기분은 어떠했을까요? 사실 저에게는 그리 특별한 느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작년에 출판했던 책들의 개정판을 출판하기 위하여 밤낮을 방에서 집중했어야 했기에 오히려 격리가 축복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분들은 몹시 불편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누님께서 제 방에 식사를 따로 날라 주는 모습을 보신 아버지께서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시면서 “내 평생에 부모와 자식이 따로 밥을 먹는 것은 처음이다. 세상에 나가 다 물어 보라 이것이 정상인지”라고 하셔서 가족 모두가 크게 웃으면서 그러게 말입니다 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미국과 한국의 코로나 관련 방역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이것을 경험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이 미국에 비하여 메르스, 사스등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효과적인 방역국이 된 것을 보면서 고난의 의미를 잘 받을 경우 어떻게 축복이 되는 가를 생각했습니다. 혹시 이 방송을 들으시는 분 중에 코로나에 걸리신 분들은 이번 기회에 주님과 더불어 이기시고 항체를 형성하셔서 미래에 더 강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런 역경을 통하여 가정과 교회, 사업체가 더 본질에 충실함으로 이런 역병을 허락하신 주님의 고귀한 뜻을 완성하고, 병마를 이기시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샬롬.

[i] Schwab, Klaus. COVID-19: The Great Reset (p. 37). Forum Publishing. Kindle Ed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