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멘토링 칼럼 97

97. 사순절특집 6 엘리 엘리 나만 못박다니

샬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비전 멘토링 칼럼 오늘은 엘리 엘리 나만 못박다니, 내가 고통받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혹시 혼자 버림받은 느낌, 모두가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있으셨나요? 일반적으로 인생에서 처음 그것을 느낄 때는 청소년기죠. 그리고 대학시절 입대, 취업, 실연, 정체성과 존재의 실체들에 대한 혼돈으로 느끼는 외로움과 고독도 있고, 출산 후유증으로 느끼는 것도, 부부간의 관계속의 외로움도 청소년기 자녀의 반항으로 느끼는 당혹스러움과 자녀들 결혼 후 빈 둥지 증후군의 외로움도 있고, 때로 부모의 이혼, 부부의 이혼, 사별로 느끼는 외로움들, 괴로움들… 어느덧 나에게도 밀어닥친 어떤 것들이 훅 들어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 엘리 나만 못박다니”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맞습니다. “엘리 엘리 나만 못박다니” 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데 나 혼자만 힘든 것 같이 느껴질 때 외치게 되는 탄식입니다. 이런 외로움, 괴로움, 버림받음의 상황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그 답을 찾아겠습니다.

이 상황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하여는 이 말씀의 원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상황으로 가야합니다. 이 세상에 계시면서 예수님께서 가장 편안하게 느끼고, 한 순간이라도 함께 하고 싶으셨던 분은 하나님 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5000명 플러스를 먹이시고 말씀을 전하시고 고치시고 하신 후에 제자들도 보내고, 군중들을 보내시고 혼자 아버지와의 시간을 위하여 한적한 곳에 가십니다. 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셨습니다. 왜 안그러셨겠습니까? 본질이 사랑이신 분께서 아버지의 사랑의 임재를 떠나 영원에서 시작하여 영원동안 아버지와 함께 천국에 계시다가 너무나 생소한 인간의 몸에, 너무나 생소한 인간의 혼에, 인간의 편협과 무식과 광폭함, 인간의 비천함, 비참함속에서 사시는 것이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오죽하면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순수한 아이들에게는 천국의 순수함이 그나마 있었으니까요. 제자들은 눈치가 빨랐습니다. 그들은 어른들에게만 예수님을 소개했고, 아이들은 예수님 곁으로 못가게 했습니다. 이런 것이 예수님을 고독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은 끝내 그 이유로 예수님께 화를 냅니다. 그 때는 한 여인이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머리에 붙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 그 향유를 팔면 가난한 자들을 섬길 수 있다면서 왜 그 비싼 것을 허비하냐고 분개해 합니다. 제정신일까요? 예수님께서 곧 유월절에 팔려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곧 죽어갈 예수님 보다 허비된 비싼 명품에 관심을 가질 뿐이었습니다.

영적인 일을 육적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 보다 돈의 신에 사로잡힌 가롯 유다는 끝내 예수님을 팔고 은 30을 받습니다. 향유값은 300 데나리온 정도였고, 가롯 유다는 30세겔, 즉 120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옥합 사건으로 오해를 한 가롯 유다에게 팔리십니다. 그리고 빌라도를 통하여 채찍을 맞으십니다.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 채찍을 치라 했습니다. 그쯤 하면 유대인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신이 할 만큼 했다 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기회를 확실하게 잡았다고 생각하고 강폭하게 밀어붙였고, 빌라도는 어찌할 수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처합니다.

그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이방인, 그리고 사실 빌라도는 너무 폭악하여 로마 황제로부터 경고 편지를 받을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하고,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여쭙습니다. 예수님은 대답을 안하셨습니다. 대신 자신을 통째로 보이십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통째로 진리에 대한 답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엘리 엘레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십니다. 물론 나머지 여섯 마디도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죽어 가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나 비참하게, 비천하게, 어머니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어린 제자 요한 앞에서 벌거벗은 채 말입니다.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 각자가 각각의 상황 속에서 당하는 고통은 모두 절대값으로 다가와 힘들고 어렵습니다. 이번 코로나를 통하여 직장을 잃고, 렌트비와 각종 세금을 고민하며, 그리고 악덕 누구에게 당하는 고통속에 눈물을 흘릴지도 모릅니다. 부부가, 부모와 자녀가 작별 인사도 못하고 죽어가는 상황들… 이럴 때 혼자 절망감 속에서 “엘리 엘리 나만 못박다니”를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버림받은채 죽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버림받고 죽어가실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외롭게 죽어가실 때 아버지의 행방을 우리가 어찌알겠습니까? 그러나 알아 차릴 수 있는 힌트가 있습니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행방을 찾는 것은 뜬 구름 잡는 것이 아닐까요? 바로 거기에 힌트가 있습니다.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셨는데 12시부터 짙은 구름이 끼고 어둠이 임합니다. 그래서 3시에 서둘러 모두를 십자가에서 내렸어야 했습니다.

왜 12시에 구름이 끼기 시작했을까요? 비가 되지 않은 구름이었습니다. 세상을 어둡게 할 정도로 진한 구름이었는데 비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인가를 감추기 위한 구름이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하나님의 임재는 성경에서 구름으로 상징될때가 있습니다. 구름 속에 계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십자가 높이로 임하여 예수님의 머리 위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려오셔서 함께 아파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뒤집어 쓰시고 죽으시기에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죽게 버리셨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님과 함께 그 십자가 위 구름속에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때로 엘리 엘리 나만 못박다니라고 울때가 있습니다. 왜 나를 버리셨나요? 왜 나를 안 도우시나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몸부림치며 절규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십자가의 예수님과 그 십자가 위 구름 속에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혼자 외로워하는 그 밤, 그 어둠 속에, 혼자 외로워 눈을 꼭 감고 느끼는 그 어둠 속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행여 인간 부모는 나를 버려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때로 이해가 되지 않는 죽음의 험한 골짜기를 지날찌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강판 손과 편팔로 우리를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아니할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세상을 주관하시기에 우리는 그 품에 안겨 편안한다면 나머지를 하나님의 의로 사랑으로 온전케 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버림받음을 통하여 구원의 의를 이루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을 통하여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그리고 그 소망이 비전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우리가 부끄럽지 않게 될 것입니다.

비전 멘토링 칼럼 오늘은 사순절 마지막 주일에 엘리 엘리 나만 못박다니, 내가 고통받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라는 제목으로 버림받음에 대하여 살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 때 비가 되지 않은 채 십자가 위를 덮었던 구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나는 고독한 어둠의 시간에 그 어둠 속에서, 우리가 질끈 눈감은 그 어둠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시길 간구합니다. 마지막 고난절 자신과 가정, 교회, 직장, 세상을 위한 회개와 중보기도로 함께 하심으로 다음주 영광의 부활절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