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예수님의 슬픔과 분노 활용법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2021년 2월 17일 수요일은 사순절, 즉,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전 40일이 시작되는 날이었고,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매우 슬퍼하시고 분노하시는 에너지를 어떻게 승화시키시고 활용하시는지에 대하여 살피며 4순절 첫 주일을 기념하겠습니다.
세례 요한 그리고 헤롯
마태복음 14장은 헤롯의 생일에 목베임을 당한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께서 헤롯왕이 죽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비판하자 화가난 헤로디아가 딸 살로메를 통해 헤롯을 충동질합니다. 살로메가 헤롯의 생일에 춤을 추고는 헤롯에게 세례 요한의 목을 원합니다. 헤롯이 세례 요한의 목을 소반위에 담아 가져오게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 요한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6개월 먼저 태어난 하나님의 선지자 요한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라고 할 정도인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줌으로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를 시킨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허탄한 왕 헤롯에 의하여, 그리고 두 여자의 농간에 의하여 허무하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안타깝고, 슬프기 그지없는 상황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제가 마태복음 14장을 묵상하고 정돈한 “그러나”라는 제목의 세례 요한을 기억하는 짧은 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4:1-12 묵상
dr.shalom
헤롯의 생일, 그가 실성한 날이
요한의 죽음, 그가 완성된 날
철없는 발은 연회장에서 춤추고
흠없는 목은 소반위에서 멈춘다
요망한 헤로디아의 혀에 놀아난 헤롯
허망한 세례요한의 목에 달아난 정의
무지한 헤롯에 농락당하는 정치 현실
무모한 로마에 농락당하는 국가 현실
무뢰한 사탄에 농락당하는 영적 현실
그러나
헤롯의 소란은 멈춘지 오래
로마의 광란은 망한지 오래
사탄의 머리는 상한지 오래
생명으로 지킨 믿음의 순수
죽음으로 지킨 천국의 거룩
물로 씻어 정결케 하던 세례
피를 드려 영원케 하던 요한
예수의 성경이 깊게 기록하고
천국의 성도가 높게 기억하네 [아멘]
저는 세례 요한의 거룩과 헌신, 그리고 죽음을 생각하면 늘 가슴 아팠었습니다. 이 시를 통해서 그를 기리고 축복할 수 있어서, 그리고 제 마음 속에 그에 대한 사랑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은 것 같아서 천국에 가면 그를 기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무리들
다시 예수님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물러나가 빈 들로 나아가십니다. 왜 빈 들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헤롯을 피해 빈들로 숨으신 것일까요? 그런 것이 아닌 것은 무리들이 쉽게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빈 들로 나가신 것은 요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례 요한이 빈 들에 거하며 석청과 꿀을 먹고, 회개를 외쳤기에 그를 기리며 빈들에 큰 슬픔과 연민을 가지고 나아가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빈 들에서 요한의 외침을 통하여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았던 이들이 다시 모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먹을 것이 없자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로 5000명의 장정들을 먹이십니다. 이는 여자와 아이를 뺀 숫자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헤롯이 한 것과 비교 분석하여 보면 예수님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슬픔과 분노를 어떻게 승화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헤롯이 생일을 맞이하여 헤롯 주변에 사람들을 연회에 초대합니다. 거기엔 고기와 술과 음악과 춤과 살인이 있었던 곳입니다. 헤롯이 분봉왕이라면 왕궁에서 그의 영역의 백성들을 돌보아야 했을 터이지만 그는 섬김이 아니라 군림을 하였고, 백성을 살리기 보다 죽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탄의 영에 속하여 적대적인 삶을 살며 사탄을 대변하였습니다.
반면 참된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왕궁이 아니라 오히려 빈들에 거하셨습니다. 헤롯왕의 비류들은 권력과 기름진 음식을 탐하여 헤롯의 생일 잔치에 모였지만, 힘없고 배경이 없던 로마 식민지 상황의 가난한 백성 무리들은 예수님 밖에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예수님께서 계신 빈들을 찾습니다.
예수님의 슬픔과 분노 활용법
헤롯이 권력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며 선지자를 죽이고 자신과 비류들이 고기와 술에 취할 때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죽음에 심각한 슬픔과 헤롯이 돌보지 않음으로 핍절한 무리를 섬기십니다.
이어지는 사건은 예수님께서 피곤해진 제자들을 먼저 배를 태워 보내시고, 자신은 마저 무리를 보내시고, 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그리고 4경, 즉 새벽 3-6시 사이에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고난에 처한 것을 아시고 호수의 물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빠져 건지시는 유명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실로 엄청난 기적과 영적 싸움을 말해 줍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허망한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한 슬픔과 헤롯왕에 대한 분노, 그리고 헤롯왕 뒤에 있는 사탄에 대한 분노에 대한 예수님의 영적 반격의 대응으로 여겨집니다. 엄청난 슬픔, 엄청난 분노감을 사랑으로 승화시켜 섬기시고, 병과 식량, 풍랑으로 무리와 제자를 괴롭히는 사탄의 세력을 응징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슬픔과 분노의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시고 또한 헤롯에 대하여 길길이 날뛰며 욕하고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헤롯이 한 일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 그에게 화를 낸다고 하여 성격이 나쁘다고 말할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감정적인 화로 가져가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부조리와 부정의에 대한 심한 가슴 아픔을 빈들에 나온 목자없는 양들같이 이들에게 더 큰 사랑으로 퍼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제자들을 구하기 위하여 물 위를 걸어 오십니다. 오천명을 먹이시고, 바다를 걸으신 규모의 이적을 행하신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도전과 적용
이것을 통하여 도전 받는 것은 우리의 위기에 대한 대처와 감정의 승화에 관한 것입니다. 당연히 분노스러운 일에 화를 낼 수 있고,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한 쪽으로 승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집약하여 불쌍한 이들을 더 강력하게 섬기도록 그 에너지를 활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을 응징하기 위하여 악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위대함은 악을 응징하기 위하여 순전한 피해자로, 복수하지 않는 순결한 피해자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도 악이 없으시므로, 악한 죄인인 우리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비전 멘토링 칼럼, 지금까지 예수님의 슬픔과 분노 활용법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그를 죽인 헤롯 왕에 대한 분노를 인간적 부정적 감정으로 표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혼자 산에서 기도하시는 시간에 아버지와 푸시고, 자신을 찾은 무리들과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더 큰 사랑으로 기적을 선물하셨습니다. 그런 코로나 시국에 낙심하거나 위축되지 마시고,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을 품으시고, 주님의 성품을 닮아 장성함으로 의미있는 사순절을 완성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