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비전 멘토링 칼럼 오늘은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배우는 위기 극복법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History repeats itself. 이 말에 동의 하십니까?
이 말을 가장 먼저 한 역사학자는 그리스 아테네 출신의 투키디데스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전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썼습니다. 그 전쟁은 그가 출생한 BC 460년에 시작하여 죽기 4년전인 BC 404년경에 끝났습니다. 오늘날 그의 이름이 역사학자들 외에도 친숙한 이유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말 때문입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기존의 국제질서를 주도하던 강대국이 약화되고 신흥 강대국이 등장할 때, 두 세력 사이의 패권 교체는 전쟁을 포함한 직접적인 충돌을 수반한다는 이론입니다. 당시 패권을 쥐고 있던 스파르타가 신흥 강국으로 등장한 아테네를 응징함으로 지중해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을 기록한 것이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이 군사력으로 치고 오르려던 소련을 응징했고, 또 경제력으로 치고 오르려던 일본을 응징했고, 최근에 경제와 정치력으로 치고 오르려는 중국을 제압하는 것은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이론을 잘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역사는 반복됩니다.
역사의 반복성은 성경적인가?
역사의 반복성은 성경적일까요? 역사의 반복성은 지극히 성경적입니다. 증거가 있나요? 그 증거는 창세기 1장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시간을, 역사를 7일 단위로 반복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조의 패턴도 창조의 첫 3일과 후 3일의 구조가 반복되게 하셨습니다. 즉 첫 3일에 하늘, 바다, 땅의 자연 구조물을 창조하시고 후 3일에 그곳을 채우는 해, 새와 물고기 그리고 동물과 사람을 창조하시는 대칭적이고, 반복적인 역사적 구조를 창조 경영 전략으로 활용하십니다.
이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그리스어로 엑소더스 떠남, 탈출이라고 표현하심으로 자신의 죽음이 모세가 행했던 엑소더스 출애굽의 영적 버전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짧은 생애 속에서 유대인의 역사를 반복하십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들어갔다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출애굽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의 아버지인 야곱이 애굽으로 들어 갔고 400년후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역사 속에서 대칭성을 가지고 반복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시자 마자 애굽으로 피난을 가심으로 이스라엘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야곱의 역사를 대칭적 반복을 보여 주십니다. 모세의 때에 모든 이스라엘 신생 남자 아이들이 죽임 당한 것과 예수님 때에 모든 신생 남아들이 죽임을 당한 것도 역사의 대칭적 반복입니다. 그리고 끝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영적 출애굽을 하면서 그를 따르는 모두를 죄악과 죽음에서 출애굽 시키십니다.
재앙의 관점에서
재앙의 관점에서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은 계시록에서는 7가지 재앙의 3번의 반복으로 대칭적 반복을 알게 합니다.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이 21가지로 늘어나는 것은 단순 반복이 아니라 심화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계시록의 재앙에서 첫 인의 환란은 국지전처럼 보이지만, 둘째 나팔의 환란은 전 지구의 1/3일에서 일어나고, 마지막 대접의 환란은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일어납니다.
재앙의 현대적 의미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의 반복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가 겪는 팬데믹 재난이 유사이래 처음있는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1세기, 즉 1000년이 다가 오는 세대에 유럽은 종말론이 횡행했습니다. 1000년의 시간이 다 찼으니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빗나가자 영적 공허가 왔습니다. 그리고 11세기엔 각종 전쟁과 질병이 세계를 강타합니다.
1095년부터 1434년까지는 약 300년간 십자군 전쟁이 당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군에 대항하여 전개됩니다. 100년 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은 1337년부터 1475년까지 영국과 프랑스간 패권 다툼으로 지속됩니다. 그리고 30년 전쟁으로 불리는 전쟁이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국간에 지속됩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유럽엔 1346년부터 1355년에 첫 흑사병이 창궐하여 100년 전쟁 중 휴전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 흑사병은 1665년부터 66년에 이르기 까지 런던에서 또 창궐했고, 18세기까지 국지적으로 지속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흑사병의 근원지 중에 하나로 중국 후베이가 언급된다는 것입니다. 흑사병이 유럽에서 시작된 것이 1346년이었지만 당시 몽고 원나라에 지배를 받는 중국 후베이에서는 1334년 역병이 창궐하여 인구의 90%가 사망한 것이 중국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이유입니다.
“모든 상행위는 멈추었고, 모든 고용도 멈추었다”
“모든 상행위는 멈추었고, 모든 고용도 멈추었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뉴스 기사거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1665년의 기록입니다. 로빈슨 크로소 Robinson Crusoe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영국의 소설가 다니엘 데포 Daniel Depot가 역병의 일기 A Journal of the Plague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 런던은 죽음의 도시로 모든 상행위가 멈추었고 고용도 멈추었으며 부자들은 런던을 피해 시골로 갔지만 그 중엔 이미 병을 가지고 떠났기에 시골까지 전염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팬데믹이 이끈 중세의 변화
1000년에 기대했던 종말과 재림이 오지 않자 영적으로 침제되었던 유럽은, 1346-1355년에 일차로 유럽을 휩쓴 흑사병으로 인하여 영성이 더 밑바닥으로 내려앉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카르페 디엠, 즉 현재를 즐겨라라는 모토를 유행시켰고, 타락을 촉진시켰습니다. 그들은 성경적 유대주의와 예수주의를 버리고, 그리스 로마의 예술주의로 회귀했습니다. 예수님의 resurrection이 아닌 예술의 Renaissance를 추구한 것입니다. 신본주의 대신 인본주의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중세 천주교의 검은 복장으로 대변되는 인간성의 말살에 대항하여 모든 인간성의 회복을 추구하는 운동이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유행합니다. 이것은 당시 권력 계급이 되었고, 말과 행실이 달랐던 교황청과 사제들의 사치와 타락에 염증을 느낀 이들의 반란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중요한 시발점은 흑사병이었습니다. 당시 종교적 지도자들의 땅에 떨어진 영성은 흑사병을 예방하거나, 퇴치하는 영적 지도력을 행하기 보다는 똑같이 죽어갔고, 당시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던 유럽인들에게 종교가 다가 아니다라며 눈을 돌리게 했습니다. 중세 교황권이 제시한 인간관은 편협한 금욕주의에 근거한 것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온전히 대변하지 못했습니다. 성도들에겐 금욕과 검소를 가르쳤지만 성당은 금치장을 하기에 바빴습니다.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성도들에게 회개를 강조하고, 회개 후 면죄부를 사도록 했습니다. 그 면죄부 판매 대금은 성당 건축에 사용되니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1517년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됩니다.
2020년 팬데믹이 가져온 변화
그간 현대 교회도 유사한 걸음을 한 부분이 있지 않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197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발전하면서 교회의 크기가 교세를 말해주고, 모든 교인들의 자랑이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부분은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 건물 중심주의의 허구를 드러나게 한 것이 미세한 미물 코로나입니다. 성전이 있으면, 성궤가 있으면 괜찮을 줄 알았던 이스라엘의 미신적 신앙에 대하여 하나님의 처방은 예루살렘 성전의 훼파와 성궤의 실종사건입니다.
2000년전 서기 30년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를 흩으셨고, 72년엔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셨습니다. 1300년 흑사병으로 유럽 성전 중심주의를 흩으셨고, 이제 2020년 다시 주님께서 교회를 흩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한번 같이 생각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답을 한 주간 생각해 보신 후에 다음주 이 시간에 반복되는 역사를 주시는 주님의 뜻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비전 멘토링 칼럼, 지금까지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배우는 위기 극복법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모쪼록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주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면서 주님의 뜻을 완성해 드리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