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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어떻게 죽을 것인가?

샬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비전 멘토링 칼럼, 오늘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먼저 소설가 김훈을 소개합니다. 그는 2001년 [칼의 노래] 라는 책으로 한국 문단에 한 획을 긋고, 그의 책은 영어, 일어, 중국어, 프랑스, 독일, 스페인어등으로도 번역되었고 만화로도 출판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그런 흥행을 했을까요? 바로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한국의 대표 소설가 중 한 명인 박완서는 “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라는 평가를 했습니다.

서론이 길어진 것은 그 위대한 소설가께서 2022년 올해로 74세를 맞이하여 최근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글을 쓰셨는데 많은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하고 문제점 한 가지를 함께 생각하여 보겠습니다.

 

望八(팔십을 바라보게)되니까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벗들한테서 소식이 오는데, 죽었다는 소식이다. 살아 있다는 소식은 오지 않으니까, 소식이 없으면 살아 있는 것이다.

지난달에도 형뻘 되는 벗이 죽어서 장사를 치르느라고 화장장에 갔었다. 화장장 정문에서부터 영구차와 버스들이 밀려 있었다.

관이 전기 화로 속으로 내려가면 고인의 이름 밑에 ‘소각 중’이라는 문자등이 켜지고, 40분쯤 지나니까 ‘소각 완료’, 또 10분쯤 지나니까 ‘냉각 중’이라는 글자가 켜졌다.

 ‘냉각 완료’ 되면 흰 뼛가루가 줄줄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나오는데, 성인 한 사람 분이 한 되 반 정도였다.

직원이 뼛가루를 봉투에 담아서 유족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유족들은 미리 준비한 옹기에 뼛가루를 담아서 목에 걸고 돌아갔다.

원통하게 비명 횡사한 경우가 아니면 요즘에는 유족들도 별로 울지 않는다. 부모를 따라서 화장장에 온 청소년들은 대기실에 모여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날 세 살 난 아기가 소각되었다. 종이로 만든

작은 관이 내려갈 때, 젊은 엄마는 돌아서서 울었다. 아기의 뼛가루는 서너 홉쯤 되었을 터이다.​

뼛가루의 침묵은 완강 했고, 범접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화장장에 다녀온 날 저녁마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생각했다.​

죽음이 저토록 가벼우므로 나는 남은 삶의 하중을 버티어낼 수 있다.​ 뼛가루 한 되 반은 인간 육체의 마지막 잔해로서 많지도 적지도 않고, 적당해 보였다.​

죽음은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으로, 애도할 만한 사태가 아니었다.​

뼛가루를 들여다보니까,

일상생활하듯이,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듯이, 그렇게 가볍게 죽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 들이지 말고 죽자,​건강보험 재정 축내지 말고 죽자,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고 가자,

질척거리지 말고 가자,​지저분한 것들을 남기지 말고 가자, ​빌려 온 것 있으면 다 갚고 가자,​

남은 것 있으면 다 주고 가자,​ 입던 옷 깨끗이 빨아 입고 가자, ​관은 중저가가 좋겠지.​

가면서 사람 불러 모으지 말자,​ 빈소에서는 고스톱을 금한다고 미리 말해두자….​

가볍게 죽기 위해서는 미리 정리해 놓을 일이 있다.​내 작업실의 서랍과 수납장, 책장을 들여다 보았더니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의 거의 전부가 쓰레기였다.​

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한 생애가 지나갔다.​

똥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둔 꼴이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 표가 안 나게 이 쓰레기들을 내다 버린다. ​드나들 때마다 조금씩 쇼핑백에 넣어서 끌어낸다.​

나는 이제 높은 산에 오르지 못한다.​

등산 장비 중에서 쓸 만한 것들은 모두 젊은이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나머지는 버렸다.

책은 버리기 쉬운데, 헌 신발이나 낡은 등산화를 버리기는 슬프다.​ 뒤축이 닳고 찌그러진 신발은 내 몸뚱이를 싣고 이 세상의 거리를 쏘다닌, 나의 분신이며 동반자이다.​

헌 신발은 연민할 수밖에 없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헌 신발은 불쌍하다. 그래도 나는 내다 버렸다.​

뼛가루에게 무슨 연민이 있겠는가.​

유언을 하기는 쑥스럽지만 꼭 해야 한다면 아주 쉽고 일상적인 걸로 하고 싶다.​

딸아, 잘생긴 건달 놈들을 조심해라.​

아들아, 혀를 너무 빨리 놀리지 마라 이 정도면 어떨까 싶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스스로  ‘광야를 달리는 말(!)’을 자칭했다.​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돌면서 평생을 사셨는데,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미안허다.” 를 남기셨다.

한 생애가 4음절로 선명히 요약되었다.​

더 이상 짧을 수는 없었다.

후회와 반성의 진정성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것은 좋은 유언이 아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었고, 대책 없이 슬프고

허허로워서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퇴계 선생님은 죽음이 임박하자​조화를 따라서 사라짐이여 다시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라는 시문을 남겼고, 임종의 자리에서는 매화에 물 줘라.​ 하고 말씀하셨다고 제자들이 기록했다.​

아름답고 격조 높은 유언이지만 생활의 구체성이 모자란다.​

내 친구 김용택 시인의 아버지는 섬진강 상류의 산골 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김용택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김용택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셨는데​ 네 어머니가 방마다 아궁이에 불 때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

부디 연탄보일러를 놓아드려라.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이야기를 김용택의 어머니 박덕성 여사님한테서 직접 들었다. 몇 년 후에 김용택의 시골집에 가봤더니 그때까지도 연탄보일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 퇴계 선생님, 김용택의 아버지,

이 세 분의 유언 중에서 나는 김용택 아버지의 유언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 유언은 건실하고 씩씩하고 속이 꽉 차 있다.​

김용택 아버지는 참으로 죽음을 별것 아닌 것으로, 아침마다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가듯이 가볍게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인생의 당면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정도 유언이 나오려면, 깊은 내공과 오래고 성실한 노동의 세월이 필요하다.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

 

비전 멘토링 칼럼, 지금까지 위대한 소설가 김훈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 중 세가지 주제에 대하여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 세가지 주제는 첫째, 화장터의 50분 화장 프로세스와 현대 유족들 표정 스케치, 둘째, 유품정리, 셋째, 유언하기입니다. 그의 글은 사람이 죽으면 육신이 어떻게 화장되는지 그리고 유품을 어떻게 미리 정돈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매우 현실적인 지식과 지혜를 전해 줍니다. 그런데 그의 글을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유언에 관한 것입니다.

작가의 아버지는 미안허다 네글자를

작가 자신은 딸아, 잘생긴 건달 놈들을 조심해라.​

아들아, 혀를 너무 빨리 놀리지 마라라고 말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시랍니다.

또 다른 위대한 시인 김용택님의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면서 자신의 아내의 고생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연탄보일러를 놓아줄 것을 유언하시고 돌아가셨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떤 유언을 준비중이신가요? 제가 발견한 아쉬운 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김훈 선생님께서 이상한 유언을 하셨다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인류가 그간 해온 유언으로 퉁치고 인생을 마감하는 익숙한 시스템을 발견하면서 느끼는 아쉬움입니다.

인간이 70-100세를 살면서 축적한 지식과 지혜와 유산들이 얼마나 많은데 몇 마디 말로 퉁치고 간단 말입니까? 물론 이 유언 전에 삶으로 보여 주신 것들이 중요하겠지만 여전히 이렇게 허무하고 허망한 유언으로 끝내는 시스템은 끝내야 한다고 봅니다.

그나마 유언이라도 제대로 하고 죽으면 다행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불러놓고 유언을 차분하게 하고 죽는 것은 호상입니다. 이번 코로나로 양노시설에서 혹은 병원에서 가족도 보지못하고 죽어가신 천하에 몹쓸 죽음의 방식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죽음 시스템은 끝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끝내야 할 까요? 이것을 끝내는 성경적 모델이 있나요? 이것들에 대하여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까지 여러분들께서도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보시고 다음 주에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샬롬,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