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비전 멘토링 칼럼, 오늘은 [죽음의 정체1]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여러분들께는 죽음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요? 불안감? 일반적으로 죽음하면 일단 기분 나빠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1) 죽음의 불안과 지옥의 공포 2) 죽음과 지옥의 공포스러운 현실 3) 하나님께서 죽음을 주신 이유와 사탄이 죽음에 대하여 거짓말하는 것 그리고 공포스럽게 죽은 도사님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죽음의 정체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 죽음의 불안과 지옥의 공포
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면 긍정보다는 부정적 반응을 할 까요? 죽음의 불안과 지옥에 대한 공포는 인간 모두에게 일반적인 것이지만, 존재에 대한 불안감에서 옵니다. 존재의 불안은 세 가지에서 기인하는데 첫째, 의식적으로는 죽음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므로 자신이 죽음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불편함과 둘째, 무의식적으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존재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기에 오는 벌에 대한 불안감입니다. 셋째, 죽음 이후에 벌로서 가게 될 지옥이 영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럴때 죽음은 의식적으로 인간에게 최대 불안을 주고, 지옥은 무의식적으로 최대의 공포를 줍니다.
그런데 지옥은 실제할까요? 지옥은 어떤 곳이기에 우리가 공포를 느낄까요? 지옥은 쓰레기장, 쓰레기 소각장 같은 개념으로 이해됩니다. 쓰레기란 더 이상 재생 활용할 가치가 없는 폐기물을 의미합니다. 존재적으로도 더 이상 선하게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이 가는 쓰레기장, 혹은 쓰레기 소각장이 지옥입니다. 쓰레기 장은 일반적으로 가장 외진 곳, 깊은 웅덩이나 불 태울 수 있는 곳에 위치합니다. 공교롭게도 지옥의 위치를 요한 계시록에서는 무저갱, 즉, 끝없이 깊은 곳 (11:7, 17:8, 20:1, 20:3)로 설명하고 또 궁극적으로는 유황불 붙는 못 (19:20), 유황 못 (20:10), 불 못 (20:14, 15)으로 설명됩니다. 궁극적 쓰레기장의 위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곳엔 다른 종류지만 같은 악을 행한 온갖 쓰레기들이 함께 모여집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 요한계시록 20:10
이곳에 함께 있는 마귀, 짐승은 악한 영들이고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곳은 장소와 종류 외에도 “세세토록” 이라는 시간의 특성이 있습니다. 이 불 못이 세세토록 불타는데 문제는 이곳에 있는 존재들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불타서 소멸하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고 지속적으로 불타며 영원히 괴로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옥과 일반 쓰레기 장과 일반 쓰레기와의 차이점입니다. 이 상황이 우주 극강의 공포를 줍니다.
- 죽음과 지옥의 공포의 현실
그러며 지옥에 안 가고 죽음과 지옥의 공포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그리고 방법은 간단합니다. 물론 인간은 절대로 이 죽음에 대한 불안과 지옥에 대한 공포감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죽음의 문제를 인간에게 주신 분이 해결할 수 있으십니다. 해결하려면 죽음의 문제를 주신 분의 의도를 알고 행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주신 의도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주신 이유
첫째는 죽음으로써 더 많은 죄를 짓지 않음으로 더 큰 형벌을 피하게 해줍니다.
두번째는 죽되 의로운 자는 천국에 갈 수 있게 하는 지구 인생 졸업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선한 의도를 가지고 죽음을 주셨지만 사탄은 인간을 다음과 같이 속였습니다.
사탄의 죽음에 대한 거짓
첫째, 죽으면 그만이니 살아 있을 때 모든 것을 즐겨라.
둘째, 죽으면 그만이니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
셋째, 죽음은 무섭다, 죽으면 다 지옥 간다. 그러니 죽음에 대하여는 생각도 말고 준비도 말라. 준비를 하여도 소용없으니 그냥 끝까지 버티다가 그냥 가라.
넷째, 죽음은 무섭다. 그러니 종교를 통하여 인격 수양도 하고, 귀신들에게 젯밥도 미리 드리고, 궁극적으로 사탄을 섬겨라. 사탄이 죽음의 신이다.
그래서 이 땅엔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하며 나름 효용성을 자랑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죽음 앞에서는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모두 허탄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죽음 앞에 종교적 인격 수양의 부질없음을 말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감옥 간수로 수많은 사형수의 죽음을 관찰한 박효진 장로님의 간증을 요약한 것입니다.
종교적 인격 수양의 허무성
한 사형 집행의 날에 이미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사형을 당했다. …
그날 세 번째 사형수는 56세, 그날의 최고령 사형수였다. 생명 보험 가입 후 아내와 네 아이들을 불태워 죽인 것이 발각되어 사형 언도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를 불교로 택하였고, 사형 언도 후 8년 간을 감옥에서 지내면서 동서고금에 좋은 책을 다 읽었고 면벽 좌선을 하면서 인격 수양을 하였다. 행여 누가 영치금을 넣어 주면 자기를 위하여 쓰지 않고 병들어 있는 죄수들을 위하여 나누어 주었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좋은 말 해줌으로 그를 도사라, 교도소의 성자라고 불렀다. 각종 불경들, 금강경, 반야심경, 천수경들을 다 꿰고 있는 사람이었다. 8년간을 수감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화를 내는 것을 아무도 본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 교도소가 어디인가? 짐승 수준의 죄수들은 사악하여 매일 같이 싸움이 있고 눈을 스스로 꿰매든지 유리 조각으로 온 몸을 자해하든지 말로 할 수 없는 더 사악한 일을 하는 곳이지 않는가? 그런 곳에서 그는 화를 내지 않고 마음을 다스리고 성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면 그의 경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런 그에게 전도를 하려고 시도하였지만 번번히 실패하였다. 이런 나에게 전도를 하느냐 하는 식이었다. 그런 그의 사형집행 날이 왔다. 이미 두 명의 남녀 죄수가 찬송하며 담대하게 죽어갔기에 그곳에 입회한 목사님은 우쭐해 있었고, 스님은 기가 죽어 있었다. 이제 그 불교권의 도사의 차례가 되자 스님이 불교권의 명예를 살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이 되었는지 기대를 가지고 기다렸다. 그런데 저쪽에서 오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어져서 걷지 못하고 교도관들에 의하여 끌려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저쪽에 있는 밧줄을 보는 순간 자율신경이 풀려서는 주저 앉았다. 입에서는 온갖 욕이 튀어나왔다. 죽음의 직전에 그는 죽음의 공포와 죽음의 분노에 사로잡혀 모든 교도관들과 소장을 욕하면서 바지에 오줌을 싸며 떨고 있었다.
소장이 사형 집행을 위하여 질문을 하자 이름은 말하였지만 본적을 묻는 순간부터는 횡설수설하였다. 죽음의 공포에 정신이 나간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를 갈면서 욕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멈추지 못했다. 순서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법에 위배가 되었지만 소장의 직권으로 절차를 생략하고 사형집행을 시켜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은 얼굴이 뒤틀린 채 남긴 “개새끼들아”였다. 스님은 그러는 와중에 예불을 드릴 기회도 갖지 못하였다. 그렇게 수양이 잘 되었던 도사였는데 그는 그렇게 죽어 갔다. 그의 죽음은 또한 다른 면에서 모든 이를 당황하게 하였다. 생전의 선행과 종교에 의지한 인격 수양이 죽음 앞에서는 헛되었던 것이었다.
샬롬 김 [크로스 코드: 암호로본 성경, 해독된 암호] (비전북하우스, 2008)
위 이야기 속의 도사의 죽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죽음의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공포는 다음 주에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비전 멘토링 칼럼, 지금까지 죽음의 정체 1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을 주신 이유는 죄를 짓는 현실에서의 해방이고 의롭게 살아간 이들에게 천국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진심과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죽음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직면한 사람들에게 죽음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 오늘 이야기 속의 도사처럼 말입니다. 결론은 죽음은 매우 구체적인 것이고 죽음 이후 영적 세계도 구체적인 것이고 심판과 천국과 지옥도 구체적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쪼록 현실과 미래가 성경의 진리와 비전 속에서 하나가 되어 복된 오늘과 내일을 향유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구합니다. 오늘 칼럼 내용은 곧 출판될 책 생명의 서에서 발췌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