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비전 멘토링 칼럼, 오늘은 [한국의 첫 회개와 부흥]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몇 주간 창세기 1장부터 6장까지 첫 인류 그리고 초기 인류의 이슈들을 살피면서 타락과 회개의 이슈를 살펴보면서 초기 인류에게 진정한 회개의 언급이 없는 것을 살피고 그것이 어떻게 10대 이후에 홍수로 열매 맺었는지를 살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 한국 평양중앙장로교회에서 있었던 회개에 대하여 현장에서 경험을 하셨던 선교사님의 글을 통하여 살펴 볼 것입니다. 모쪼록 우리도 그 열기 속으로 들어가서 오늘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1907년 장대현 교회의 회개
다음 글은 당시에 중국에서 선교 사역을 하시던 캐나다 죠나단 고포드 (Jonathan Goforth, D.D.)선교사와 그의 아내 로사린드 (Rosalind)가 경험한 것을 쓴 소 책자 “조선에 성령의 불이 휩쓸었을 때 (When The Spirit’s Fire Swept Korea)를 요약한 글입니다. 고포드여사는 남편의 이름으로 이 책을 쓰고 출판을 앞 둔 몇 일 전 “나의 왕이 나를 부르신다. 나는 갈 준비가 되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시고 소천하시었습니다. 그 당시 그녀의 얼굴은 빛났고,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답니다.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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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부흥은 1906년 9월 서울에서 열린 한 선교사 회합에서 태동되었다. 사실 조선은 1903년부터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국가에 비해 전도의 열매가 훨씬 많은 편이어서 선교사들은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었고, 그 이상의 축복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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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중앙장로교회에서 9월 중순부터 기도회 시작되었다. 한 달이 지나도록 특별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자 한 사람은 너무 많은 시간을 기도에 소모하고 있으니 연합기도회를 중단하고 각자 집에서 기도하자고 제안했지만 대다수는 이 기도회를 계속 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인도에서 허락하신 것을 평양에서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하기로 작정했다. 그때부터 그들은 정오에서 오후 4시까지 기도하기로 했으며 원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더 기도하도록 했다. 4개월 동안 그들은 계속해서 기도했고, 기도 외에는 별로 하는 일이 없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장로교, 감리교를 잊어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1907년 정월, 드디어 4개월 간의 기도가 끝나는 마지막 주간이 되었다. 선교사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그 주간에 있는 평양중앙장로교회의 부흥집회에 놀랍게 축복하실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지막 날 저녁 집회에는 1,000여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국 교회의 지도자인 길선주 장로가 일어나서 자기의 죄를 고백했다. “저는 아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때문에 축복하실 수 없습니다. 나는 1년 전 내 친구가 임종하면서 맡긴 재산을 관리하면서 그 미망인의 돈 100불을 가로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가로막았습니다.”
그 순간 장애물이 걷혀졌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인식되었다. 곧이어 죄의 자각이 모든 신자들을 휩쓸었다. 그날 저녁 예배는 새벽 2시가 되어도 끝이 나지 않았다. 아직도 수십 명이 울면서 그들의 죄를 고백할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것은 마치 지옥의 뚜껑을 열어놓은 것 같았다. 이 집회를 기점으로 조선에서는 회개의 역사가 놀랍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 기간에 있었던 회개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겠다.
거의 완전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존경을 받던 한 집사는 부흥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안절부절하다가 드디어는 교회 구제기금을 훔친 것을 자백했다. 모든 사람들은 놀라면서 그를 용서하고 다시 평안을 되찾기를 바랬지만 그는 더 큰 불안에 떨었고 결국 자기가 지금도 도적질을 하고 있음을 고백했다.
한 여인은 며칠간 지옥의 고뇌를 통과하는 것 같았다가 어느 저녁 군중이 모인 자리에서 간음의 죄를 고백했다. 그 모임을 인도하던 선교사는 너무나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남편이 거기에 있었으므로 그녀를 조선의 법대로 죽일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남편은 눈물로 걸어나와서 범죄한 그의 아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녀를 용서했다. 이러한 놀라운 사건들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교회는 사람들로 들끓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조롱하기 위해 교회에 왔다가 두려움 중에 기도하기 시작했다. 한 도둑 두목은 호기심으로 왔다가 죄를 깨닫고 자기를 감옥에 넣어 달라고 간청했다. 깜짝 놀란 경찰관은 그를 고소하는 사람도 없고 증거도 없으므로 체포할 수 없다고 맞섰고 그는 결국 풀려났다.
이 부흥의 때에 평양을 맡고 있던 일본 관리가 있었다. 그는 서구의 불가지론에 물들어 신자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런데 많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어를 모른 어떤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이 이상한 변화를 조사하기 위해 그 모임에 참석했다가 그도 결국 주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되었다.
참으로 기도하기 위해 보낸 몇 달의 대가는 충분한 것이었다. 성령이 오셨을 때에 선교사 모두가 반년 동안에 할 수 있었던 일을 반나절에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부흥의 운동은 평양에서 출발하여 조선 전역에 넘쳤고 시간이 지나가도 계속되었다. 1910년 10월 어느 한 주의 평양 교회 통계를 보면 그 주에만 4,000명이 세례를 받았고, 수천 명이 새로 교회에 등록했다. 1916년 동해안을 방문하고 온 한 선교사는 어느 마을에서 저녁예배를 드린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한 교회에 2,500명이 모이고 다른 교회에 500명이 모였는데 그 마을의 전체 인구수가 3,000명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자 시골 곳곳에도 많은 교회가 생겨났고 심지어는 선교사나 전도자가 방문한 적도 없는 곳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어떤 사람이 도시에서 복음을 듣고는 고향으로 성경을 가지고 돌아가 그것을 이웃에게 계속하여 읽어주었고 결국 그 마을에서 50명이 넘는 사람이 믿게 되었다. 그때 그들은 교회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으나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고민하다가 신약성경에서 교회의 시작이 물세례라고 추측하고는 각자 집으로 가서 목욕을 하고 다시 모여 교회를 설립했다. 하나님이 틀림없이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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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교회의 새벽기도회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907년 9월 길선주 장로가 평양중앙교회의 목사가 된 후에 시작되었다. 그는 매일 아침 4시 30분에 모여서 기도할 것을 제안했는데 다음날 새벽 2시부터 400명의 신자가 밖에서 기도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매일 700명이 모여 기도회를 하고 있다.
풍성한 너그러움, 이것이 초대 교회의 또 하나의 특징이었다. 조선의 신자들 역시 풍성했다. 어떤 곳에서 한 선교사가 나에게 말하기를 그들은 너무 많이 내놓기 때문에 그는 감히 돈에 대해서 말을 못한다고 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는 그들이 가졌던 모든 것을 바쳤다. 남자들은 시계를 끌렀고, 부인들은 패물을 내놓았다. 다른 이들은 땅문서를 바쳤다. 그들은 가진 모든 것을 내 놓았고, 더 바칠 것이 없어서 울었다. 교회 헌당식에 참석한 한 신자는 교회에 아직 50불의 부채가 있음을 듣고 자기가 다음 주에 50불을 가지고 오겠다고 했다. 선교사는 그가 매우 가난한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만류했지만 그는 다음 주일 50불을 가지고 왔다. 몇 주간 후 그 선교사는 그 지역을 시찰하는 중에 그의 밭에 가보니 노인은 쟁기를 잡고 아들은 쟁기를 끌고 있었다. 선교사는 놀라서 소를 어떻게 했냐고 묻자 그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불신자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청산하기 위하여 소를 팔았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비전 멘토링 칼럼, 지금까지 한국의 첫 회개와 부흥이라는 제목으로 1907년 평양중앙장로교회에서 있었던 기도회와 회개의 열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진정한 회개는 하늘을 움직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한 능력에 사로잡히며 개인의 심령과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를 부흥시킵니다. 모쪼록 오늘날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이런 회개와 부흥이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