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첫 부부와 첫 자녀들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창세기 4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부부 아담과 이브의 첫 자녀들은 우리가 아는데로 가인, 아벨 그리고 셋입니다. 큰 아들 카인이 둘째 아벨을 죽였고, 후에 셋이 태어나서 아담의 계보를 잇습니다.
카인은 왜 그렇게 살인까지 하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정확한 답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몇 가지 정황은 영성의 중요성, 부부관계와 자녀 교육에 대하여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우선 카인이 왜 그렇게 되었겠는지를 추론해 보겠습니다.
위대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의 큰 아들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아담의 특별한 능력들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독대하여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하나님 형상에서 배어 있는 능력들을 소유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흙으로 지음 받은 특성을 활용하여 이름 지으신 것을 알고는 동물들의 이름을 지으라는 말씀을 하나님께 들었을 때 같은 방식으로 행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절정은 이브의 이름을 짓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이브가 남자 이쉬에서 지음 받았으니 이샤라고 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더 놀라운 점은 이것이 태어난지 하루도 안 지난 사람에 의하여 창조의 6일차에 행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담이 가졌던 지혜와 지식은 경험을 근거로 하는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영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형상성 속에 있는 영성의 놀라운 점입니다.
그럼 그렇게 뛰어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카인은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요?
당연히 그 이유는 선악과에서 찾아야 하지만 그의 심리적 상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악을 구분하면서 악을 행하게 된 인간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아담에게 나타난 증상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숨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열매 먹은 여부를 추궁하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2)라고 하나님과 여자 핑계를 뎁니다. 이렇게 인간은 선악을 알되 악을 선택하여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시키려 합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 두려움을 드렸고, 그들을 에덴에서 추방하시게 됩니다. 하나님께 두려움을 드렸다는 것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창 3:22)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말이 그렇지 에덴에서 모든 안락과 풍요와 권세를 누리고 살던 사람들이 에덴 밖으로 추방되었다는 말에 뜻이 무엇일까요? 당황을 넘어 황당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적응점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1. 신체 2. 심리 3. 영성 4. 동물들과 약육강식의 싸움입니다.
첫째 신체적으로 인간은 광야용으로 지음 받지 않았기에 특별히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동물들은 그래도 적응을 했지만 인간은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정원을 중심으로 살면서 광야를 개간하여 전 지구를 에덴처럼 만드는 일에 부름 받았습니다. 그래서 광야를 중심으로 사는 것엔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원에서 과일을 주로 먹도록 되었다가 광야에서 이제는 스스로 경작한 곡식과 채소를 주로 먹도록 되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둘째 심리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존중하도록 되었지만 선악을 구분하고 나서는 서로에게 “너 때문에” 내가 추방되어 이렇게 고생을 한다는 식으로 서로를 비난하였을지 모릅니다. 처음부터 광야에서 시작했으면 그것이 당연했겠지만 에덴에서 살다가 광야로 추방된 경우의 심리적 상처와 괴로움은 오죽했겠습니까? 이전에는 노동이 곧 운동이었고 기쁨이었지만 이제 노동은 가혹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적 피곤함은 심리적 여유를 줄이고 서로에게 비판적이 되게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셋째 영적인 지혜와 능력이 현저히 감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창세기 6장 3절에서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영이 인간에게서 떠나시면서 마침내 영성은 바닥을 쳤을 것입니다.
넷째 에덴에서 나오면서 영적 권세도 빼앗기면서 동물들과 약육강식의 싸움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첫 자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우선 카인을 광야에서 출산했을 때 아담은 여전히 여호와를 드높이는 영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창4:1)고 하나님을 드높입니다. 그리고 아벨이 태어납니다.
가인이 농사를 지었다는 것으로 보아서 농사가 우선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적이라는 것은 하기 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심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을지도 모르죠. 거기에 비하여 양치기는 매일 그들과 씨름을 해야 하는 귀찮은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가인은 먼저 태어나 좀 쉬운 일을 선점하여 편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건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던 날에 생깁니다. 잘 아시는데로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 것은 받지 않으시자 가인이 아벨을 불러내어 들에 있을 때 쳐 죽입니다. 고의성이 였보이는 범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제물을 같이 받지 않은 하나님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럼 왜 가인의 제물을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양고기가 아니어서라고 말하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는 (사무엘 상 16:7) 것처럼, 사람은 고기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자 “분하여 안색이 변”합니다. (창 4:5)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고 말씀하십니다.
즉, 가인은 안색이 변하고 땅을 쳐다보며 씩씩거렸나 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가인은 “맏이 신드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맏이 신드롬?
첫째 아이는 자신이 모든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었다가 둘째가 태어나면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다 빼앗긴 것과 같은 상실감으로 인하여 둘째에 대한 질투심과 증오심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큰 아이가 둘째를 베개로 헤 꼬지 하는 등의 사고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특별히 에덴에서 살다가 갑자기 광야에서 생존을 위하여 살았어야 했던 아담과 이브의 첫 아들에게 더 심각할 수있습니다. 에덴의 풍요 속에서 태어났더라면 보다 영적이고 이상적인 육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결핍된 광야에서 일에 쫓기는 상황에서 그리고 처음으로 아가를 출산한 아담과 이브로서는 출산의 고통과 더불어 모든 것이 생소하고, 스트레스가 가증되고, 때로는 서로에 대한 애증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스트레스 속에서 갈등하는 부모를 보고 자란 가인, 그리고 곧 태어난 아벨로 인하여 그나마 받던 사랑과 관심을 빼앗겼다 싶었을 때 가인에게는 지속적인 비교의식과 상실감과 심리적 상처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때 그것은 부모인 아담과 이브만이 아니라 하나님도 아벨을 편애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판단에 따라 그것을 악으로 규정하고 악을 심판하게 됩니다.
비전 멘토링 칼럼, 오늘은 첫 부부와 첫 자녀들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아담과 이브 부부와 그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은 아벨이 태어난 이후에 둘째에게서 부모를 빼앗겼다는 박탈감의 상처가 있고, 또 하나님마저 빼앗겼다는 박탈감을 가진듯합니다.
이렇듯 선악과를 잘못 먹은 후 인간의 죄는 영, 혼, 육, 관계의 죽음을 가져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오는 거룩하고 권능 있는 영성의 파괴로 이어졌고 영성이 파괴되자 인간은 알량한 지성과 감성을 가지고 큰 판단과 죄 속으로 빠집니다. 모쪼록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영성과 비전의 회복을 통하여 개인과 가정의 회복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샬롬.